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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6년 4월 1일 수요예배 | 운영자 | 2026-04-03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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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4-01 수요예배 예배로의 부름 : 이사야 46:4 4) 너희가 늙어도 나는 여전히 너희를 품에 안고 너희가 백발이 돼도 여전히 너희 편을 들어 주겠다. 내가 만들었으니 내가 감당하겠다. 내가 편을 들어 주고 내가 구해 내겠다. 예배 기원 우리의 산성이시며 피난처가 되시는 하나님 아버지. 오늘도 예배의 자리로 부르시니 감사드립니다. 세월이 흐를수록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고 육신은 하루가 다르게 연약해짐을 느낍니다. 그러나 오늘 이 예배를 통하여 우리의 속사람은 독수리처럼 날마다 새롭게 비상하는 은혜를 더하여 주시옵소서. 연약한 육신과 힘든 마음을 안고 예배의 자리를 찾은 성도들의 간절한 기도를 들어주시고, 평안으로 채워주시는 복된 예배의 시간으로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감사하며 기도드립니다. 아멘. 신앙고백 : 사도신경 찬양 : 309장 / 목마른 내 영혼 기도인도 : 조용숙 집사 성경 봉독 : 로마서 15:1-6 설교 : 약점을 감싸주고 말씀을 위해 함께 기도드리겠습니다. 오늘도 말씀 앞에 불러주시니 감사드립니다. 수없이 들어온 익숙한 말씀이지만, 오늘 이 저녁 들려주시는 말씀이 우리의 굳어진 심령을 녹이는 생명의 말씀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말씀이 남은 한주간을 살아갈 든든한 힘이 되게 하시고, 매일의 발걸음을 비추는 빛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감사하며 기도드립니다. 아멘. 사랑하는 성도님들. 오늘 이 진리의 말씀을 마음에 품고, 매일의 삶이 말씀이 이끄는 삶이 되도록 도전하는 은혜의 시간이 되시길 소망합니다. 오늘 우리가 나눌 로마서 15장의 앞장인 14장에서 사도 바울은 교회 공동체 안에서 형제를, 특히 아직 신앙의 뿌리가 깊지 못해 흔들리는 연약한 형제를 함부로 재단하거나 비판하지 말라는 엄중한 경고를 남겼습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가 함께 묵상할 15장은, 14장의 말씀을 단순한 금지가 아닌, 형제를 적극적으로 섬기고 마침내 온전한 하나 됨을 이루라고 말씀하십니다. 먼저 본문 1절의 말씀을 다 함께 마음에 새겨보겠습니다. 1) 우리 강한 사람들은 마땅히 연약한 사람들의 약점을 감싸 주고 자기가 기뻐하는 대로 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우리는 보통 어떤 분들을 향해 믿음이 좋다고 말합니까? 오랜 세월 주일 성수를 생명처럼 지키고, 고된 삶 속에서도 정성껏 헌금을 구별하여 드리며, 교회의 궂은일을 도맡아 하시는 분들을 봅니다. 물론 그것들은 참으로 귀한 신앙의 열매들이며, 결코 가벼이 여길 수 없는 아름다운 헌신의 모습들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이 가리키는, 그리고 하나님이 보시는 성숙함의 척도는 바로 내 곁에 있는 믿음이 약한 자의 약점을, 내가 얼마나 내 어깨에 짊어지고 갈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믿음이 강한 자가 마땅히 져야 할 거룩한 의무이자, 영적 성숙의 절대적인 기준이 되는 것입니다. 이 1절의 말씀을 온전히 이해하기 위해 당시 로마 교회가 처해 있던 상황을 조금 살펴보겠습니다. 1세기 로마 교회는 결코 평온하지 않았습니다. 전통 유대인들과 로마로 넘어온 유대계 그리스도인들 사이에 일어난 분쟁으로 인해 로마 황제는 유대인들을 로마에서 추방하게 됩니다. 그로 인해 유대인들이 떠나있던 5년 동안, 로마의 가정 교회들은 이방인 신자들이 중심이 되었습니다. 이 이방인 신자들은 유대교의 복잡한 정결 예식이나 음식법, 규례, 안식일 준수 등으로부터 자유를 누리며 그들만의 기독교 문화를 형성해 나갔습니다. 그런데 황제가 죽고 추방령이 해제되어서 유대계 신자들이 다시 로마로 돌아오게 되었고, 서로간의 엄청난 신학적, 문화적 충돌이 발생하게 됩니다. 율법의 멍에에서 벗어나있는 이방인 신자들과, 오랜 시간 지켜온 율법적 관습, 특정한 음식과 절기에 얽매여 있는 유대계 신자들 사이에 오해와 갈등이 생긴 것입니다. 바울이 여기서 말하는 ‘강한 사람들’은 신학적으로 바른 지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우상에게 바쳐진 고기라도 하나님이 주신 음식이니 감사함으로 먹으면 그만이라는 참된 자유를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들이 그 지식과 자유를 가지고, 유대계 신자들, 즉 ‘연약한 사람들’을 멸시하고 업신여겼다는 데 있었습니다. 당시 로마 사회는 힘 있는 강자가 약자를 억누르고 자신의 권리를 마음껏 행사하는 것을 자랑과 명예로 여기던 세상이었습니다. 남의 짐을 대신 져주는 것은 노예나 하층민들이나 하는 수치스러운 일로 치부했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십자가의 복음으로 이 오만한 세상의 가치관을 뒤집습니다. 강자가 자신의 자유와 권리를 자발적으로 포기하고, 도리어 연약한 형제의 짐을 능동적으로 떠안는 것, 그것이야말로 세상은 결코 흉내 낼 수 없는 기독교의 숭고한 명예임을 선언한 것입니다. 바울이 "약점을 감싸주라"고 할 때 사용한 단어는 무거운 짐을 어깨에 메고 인내하며 걸어가는 행위를 뜻합니다. 이것은 눈에 거슬리는 형제의 행동을 속으로만 참아주거나 겉으로 대충 묵인하는 소극적인 태도가 아닙니다. 그것은 형제의 영적인 미성숙함, 그로 인해 내가 겪어야 하는 불편함, 심지어 부당한 오해나 비난까지도 마치 내 짐인 것처럼 내 어깨에 짊어지고 함께 고통을 감내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갈라디아서 6장 2절에서 바울이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고 권면한 것과 일치하는 위대한 사랑의 원리입니다. 우리 성도님들. 오랜 세월 동안 여러분에게 모진 풍파를 견뎌낼 수 있는 강인한 믿음을 주셨다면, 기도의 깊이와 인내의 능력을 주셨다면, 그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나 혼자만의 영적인 자부심을 누리라고 주신 것이 결코 아닙니다. 세상의 풍파에 지쳐 쓰러져 가는 사람들, 아직 신앙의 깊이를 알지 못하는 연약한 지체들을 위해 그들을 이해하고 사랑하고 대신 짐을 져주라는 사명인 줄로 믿습니다. 오랜 세월 다져진 단단한 믿음을 가지고, 믿음이 약한 자들을 가슴으로 품어 섬기라고 우리를 부르신 것입니다. 이 ‘약점을 감싸주라’는 말씀을 보시죠. 사람들은 어떻게든 경쟁자의 약점을 찾아내서 그것을 집요하게 파고들고 공격하려고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상대방의 아주 작은 허물이라도 발견하면 그것을 크게 부풀려서 약점을 잡고 흔드는 것이 세상의 생존 방식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인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그런 방식으로 살아가는 존재가 아닙니다. 우리는 형제의 치명적인 약점을 보게 될지라도, 그것을 들춰내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사랑으로 덮어주고 그 상처를 보호해 주어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도대체 왜 우리가 그렇게까지 손해를 보며 살아야 합니까? 그 이유는 단 하나, 우리 주님께서, 흠 많고 죄 많은 우리의 치명적인 약점을 당신의 거룩한 보혈로 십자가 위에서 먼저 덮어주셨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죄인인 우리를 끝까지 사랑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더러운 죄의 짐을 우리에게 따져 묻지 않으시고 친히 대신 짊어지셨습니다. 우리가 형제의 약점을 담당한다는 것의 참된 의미가 바로 이것입니다. 단순히 모른 척하고 눈감아 주는 가벼운 아량이 아닙니다. 상대방의 허물과 죄를 덮어주는 그 고통스러운 과정 속에서, 나 역시 그에 따르는 억울한 대가를 함께 치를 각오를 하는 것입니다. 내가 그 짐을 대신 짐으로써 부당한 오해를 받고, 때로는 물질적인 손해나 마음의 깊은 상처를 입게 되더라도, 포기하지 않고 그 길을 가는 것입니다. 왜 그래야만 합니까? 우리의 구원자이신 주님께서 바로 나를 위해 그 고난의 잔을 마셨기 때문입니다. 만약 주님께서 매일 밤 우리가 잠자리에 들기 전에, 하루 종일 지은 우리의 모든 위선과 탐욕, 실수와 죄악들을 하나하나 끄집어내셔서 "너 오늘 도대체 왜 그렇게 살았느냐?"라고 추궁하시면서 우리의 약점을 파고드신다면, 과연 이 자리에 살아남아서 숨을 쉴 수 있는 사람이 단 한 명이라도 있겠습니까? 주님께서 그토록 오랜 세월 동안 우리의 수많은 약점과 넘어짐을 그분의 넓은 품으로 덮어주시고 또다시 기다려주셨듯이, 우리 역시 내 곁의 형제가 보이는 잘못과 미성숙함을 너무 날카로운 잣대로 물고 늘어져서는 안 될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 오랜 세월 함께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참으로 내 마음을 찌르고 속상하게 하는 이들이 있기 마련입니다. 이유 없이 가시 돋친 말을 내뱉고, 상식에 어긋나는 행동으로 속을 썩이는 사람들을 대할 때면 우리의 인내심은 바닥을 드러내곤 합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성도님들. 그들을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기다려주는 넉넉한 믿음의 성도들이 되어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속을 썩이고 막말을 쏟아내는 그 사람의 아픈 내면과 약점을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참고 덮어주며 인내할 때, 우리는 비로소 우리를 향해 오래 참으신 주님의 마음을 깊이 깨닫게 될 것이며, 진정으로 주님을 닮아가게 될 것입니다. 두 번째로, 1절 하반절에서 바울은 믿음이 강한 자는 "자기가 기뻐하는 대로 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2절을 통해 그 실천적 방향을 구체적으로 제시합니다. 2) 우리 각 사람은 이웃을 기쁘게 해 선을 이루고 덕을 세워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의 가장 뚜렷한 특징은 철저히 자기중심적이라는 사실입니다. 자기중심적이라는 말은 삶의 모든 에너지와 목적이 오로지 자기 자신을 기쁘게 하고, 자신의 안위를 도모하며, 자신의 권리를 극대화하는 데 맞추어져 있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우리 예수님의 생애는 철저하게 남을 위해 내어주신 삶이었습니다. 오직 죽어가는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기 위해, 하늘의 모든 영광을 버리시고 당신의 목숨까지도 남김없이 십자가에 쏟아부어 주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그토록 입술로 고백하는예수님을 닮아간다는 것은 어떤 모습이겠습니까? 그것은 나이가 들수록, 신앙의 연륜이 쌓일수록 자기 자신을 위해 움켜쥐는 것이 점점 없어지는 사람입니다. 내게 주어진 시간도, 물질도, 세상을 살며 얻은 경륜과 지식조차도 이웃을 섬기는 일에 기꺼이 내어주는 사람, 그가 바로 예수님을 닮아가는 사람인 줄로 믿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여기서 매우 중요한 영적 원칙 하나를 말합니다. 무턱대고 이웃의 비위를 맞추며 그들을 기쁘게 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2절을 다시 보시면, 덕을 세운다는 말은 무너진 건물을 기초부터 다시 견고하게 세워 올린다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즉, 우리가 이웃을 기쁘게 하는 궁극적인 목적은, 상대방의 일시적인 기분을 맞춰 주려는 처세술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알콜 중독에 빠진 사람의 기분을 맞춰주겠다고 술을 사주는 것은 사랑이 아닌 것이며, 어린아이를 사랑한다고 해서 몸에 해로운 불량식품을 잔뜩 사주거나 하루 종일 컴퓨터 게임을 하도록 방치하는 것은 사랑이 아닌 것입니다. 형제의 약점을 덮어주고 끝까지 인내하라는 이 숭고한 말씀은, 결코 누군가의 악의적인 언행이나 정서적인 폭력마저 무조건 참고 견디라는 뜻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신앙이 연약해서 빚어지는 실수와 타인의 영혼을 고의로 찌르고 파괴하는 악행을 지혜롭게 분별할 수 있어야 합니다. 무조건적인 희생과 침묵만이 항상 선을 이루는 것은 아닙니다. 누군가의 반복되는 무례함과 가시 돋친 말이 여러분의 영혼을 깊이 멍들게 하고 있다면, 억지로 그 곁에 머물며 스스로를 병들게 방치할 필요는 없는 것이죠. 때로는 단호하게 진리를 말하며 서로 간에 건강한 경계선을 세우는 것, 그리고 상처받은 내 영혼을 먼저 안전하게 보호하는 것이 무너진 질서를 바로잡고 진정한 덕을 세우는 시작일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짊어지라고 하신 것은 연약한 형제를 함께 살려내기 위한 거룩한 사랑의 수고이지, 타인을 함부로 대하는 무례함을 정당화 해주는 값싼 은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런 과정은 쉽지 않습니다. 약자를 영적으로 세워주기 위해 권면하고 희생하다 보면, 도리어 억울하게 오해나 비난을 받을 때도 있습니다. 수고했다는 인사 보다는, 냉대를 견뎌내야 할 때도 있습니다. 바울은 그런 상황 속에서 흔들리는 우리를 향해 다시 한번 십자가의 주님을 바라보라고 촉구합니다. 3절입니다. 3) 그리스도께서도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기록되기를 “주를 욕하는 사람들의 그 욕이 내게 미쳤다”라고 한 것과 같습니다. 우리가 참으로 주님의 뒤를 따르는 제자라면, 이러한 고난과 오해는 삶 속에서 경험하게 마련입니다. 그럴 때면 인간적인 마음에, 내가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내 돈까지 써가며 욕 먹고 이 고생을 하는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 순간에 우리 주님을 깊이 묵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이 땅에 인간의 몸을 입고 내려오셔서 온갖 멸시와 조롱을 당하실 때, 단 한 번이라도, 나는 하늘 영광 보좌에 앉아서 마땅히 경배를 받을 존재인데, 어쩌자고 이 버러지 같은 인간들 틈에 와서 고맙다는 소리도 못 듣고 이 끔찍한 수모를 당해야 하는가 라고 후회하거나 억울해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세상을 구원하시기 위해 그 모든 수치를 기꺼이 감당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님들. 우리의 신앙생활이란 한마디로 요약하면, 나를 구원하신 주님을 따라, 굳이 하지 않아도 될 억울한 희생을 자발적으로 선택하며 기쁨으로 짊어지는 것인 줄로 믿습니다. 이제 우리는 축복의 개념을 새롭게 세워야 합니다. 주님과 동행하며 그분의 마음을 나의 삶 속에서 조금이나마 느끼고 따라 가는 것, 그것이야말로 참된 축복입니다. 그 과정에서 손해를 보는 것도 축복입니다. 그러니 여러분, 다른 사람들과 나를 비교하면서, 남들은 다 편하게 적당히 신앙생활 하는데, 왜 나만 이렇게 살아야 하는가 라고 생각지 마시고, 우리의 절대적인 비교 기준은 내 옆에 있는 나약한 인간이 아니라,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이심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손해 보고, 오해받고, 까닭 없이 욕먹는 그 자리가 주님이 계신 자리였음을 생각하며 묵묵히 버텨낼 때, 그 인내의 세월이 흐른 어느 날, 우리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빚어져 있을 줄로 믿습니다. 마지막으로 바울은 이 불가능해 보이는 삶을 가능케 하는 영적인 동력을 우리에게 제시합니다. 먼저 4절을 보겠습니다. 4) 무엇이든지 이전에 기록된 것은 우리에게 교훈을 주기 위해 기록됐습니다. 이는 우리로 하여금 성경이 주는 인내와 위로로 인해 소망을 품게 하려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동안 수요일마다 창세기를 통해 아브라함의 생애를 깊이 묵상하며 은혜를 나누었습니다. 그의 삶 가운데 실수하고 넘어지고 절망하는 순간마다 하나님께서 찾아오셔서 말씀으로 위로해 주시고 소망을 주셨던 것을 우리는 기억하고 있습니다. 우리 성도님들의 삶도, 돌아보면 흔들리고 넘어질 때도 많았지만, 결국 여러분을 다시 일으켜 세우고 여기까지 인도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주시는 위로와 소망이었음을 믿습니다. 성경 속 수많은 믿음의 선진들이,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살았는지를 말씀을 통해 읽고, 확인하고 믿을 때, 우리도 하늘의 소망을 품게 될 줄로 믿습니다. 그리고 5절과 6절에서, 이 모든 과정을 통해 이룩해야 할 교회의 아름다운 목적을 보여줍니다. 5) 이제 인내와 위로의 하나님께서 여러분으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를 본받아 서로 같은 뜻을 품게 하시고 6) 한마음과 한입으로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릴 수 있게 해 주시기를 빕니다. 서로 살아온 배경이 다르고 성격이 다를지라도, 인내하며 내 고집을 꺾고 그리스도를 본받아 기꺼이 서로를 받아들임으로써 하나 됨을 이루어내는 것. 그리하여 서로 다른 생각과 모양을 가진 자들이 어우러져 한마음, 한입으로 하나님께 찬양을 올려드리는 것. 이것이 하나님께서 가장 기뻐하시는 우리의 예배인줄로 믿습니다. 마지막 날,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섰을 때, 우리에게 무엇을 물어보시겠습니까? 세상에서 얼마나 남부럽지 않게 떵떵거리며 살았느냐? 라고 묻지 않으실 것입니다. 주님의 질문은 오직 하나일 것입니다. 네가 이 땅에 머무는 동안, 나의 피값 주고 산 네 연약한 형제를 얼마나 뜨겁게 사랑하였느냐? 그들의 허물을 덮어주기 위해 네 어깨가 얼마나 무거워졌느냐? 하나님께서는 형제를 품어낸 우리의 사랑의 깊이만을 보실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고단한 육신을 이끌고 예배의 자리를 지키시는 것만으로도 버거우시겠지만, 주님을 묵상함으로 힘을 얻어 내 곁의 연약한 이들을 따뜻하게 안아주고, 그들의 상처를 사랑으로 덮어주는 여러분들 되시길 간절히 부탁드립니다. 좁고 험난하지만 영광스러운 이 사랑의 길을 묵묵히 걸어가실 때, 인내와 위로의 하나님께서 하늘의 평안으로 여러분의 남은 생애를 채워주실 줄로 확신합니다. 오직 주님만 바라보며 형제의 짐을 나누어지는 이 거룩한 부르심에 내 삶을 내어드려서, 우리 교회가 세상이 흉내 낼 수 없는 참된 소망의 공동체로 우뚝 서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마무리 기도> 은혜와 자비가 풍성하신 하나님 아버지. 저희를 포기하지 않으시고, 크신 사랑으로 인내하고 위로해 주심을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오랜 세월 주님을 의지하며 이 자리를 지켜온 성도님들의 삶을 살펴 주시고, 그들의 수고와 헌신 위에 하늘의 위로를 더하여 주시옵소서. 주님, 이제는 저희가 내 고집과 권리를 십자가에 내려놓고, 연약한 자의 짐을 대신 짊어지신 예수님의 마음을 품기 원합니다. 억울함과 서운함을 이겨내고 형제의 허물을 사랑으로 덮어주는 넉넉한 믿음의 사람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저희 공동체가 서로의 다름을 은혜로 품어 안아, 한마음과 한 입술로 주님을 찬양하는 교회가 되게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감사하며 기도드립니다. 아멘. 찬양 : 435장 / 나의 영원하신 기업 폐회 : 주기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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