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2026년 2월 25일 수요예배 | 오인권 | 2026-02-25 | |||
|
|||||
|
26-02-25 수요 예배 예배로의 부름 : 이사야 41:10 10) 그러니 두려워하지 마라. 내가 너와 함께 있다. 걱정하지 마라. 나는 네 하나님이다. 내가 너를 강하게 하고 너를 도와주겠다. 내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어 주겠다. 예배 기원 우리의 참된 위로와 소망이 되시는 하나님. 오늘도 우리의 일상을 지켜주시고, 은혜 가운데 거하게 하시다가 이 저녁 예배의 자리로 불러주시니 감사드립니다. 마음에 품고 온 염려나 일상의 크고 작은 걱정들이 있다면 이 시간 주님 앞에 모두 맡겨드리고 주님의 따뜻한 품에 안기어 참된 평안을 누리길 원합니다. 우리의 예배를 기쁘게 받아주시고, 성도들의 심령 위에 크신 위로와 기쁨을 부어 주시옵소서. 오늘 드리는 이 예배가 우리에게는 영혼의 쉼과 회복이 되며, 하나님께는 온전한 영광이 되는 은혜의 시간이 되기를 소원하오며 예수님의 이름으로 감사하며 기도합니다. 아멘. 신앙고백 : 사도신경 찬양 : 270장 / 변찮는 주님의 사랑과 기도인도 : 오인권 집사 성경 봉독 : 창세기 22장 6-19절 설교 : 여호와 이레 말씀을 위해 함께 기도드리겠습니다. 사랑과 은혜가 풍성하신 아버지 하나님. 이 시간 주님의 은혜를 사모하며 우리의 마음을 활짝 엽니다. 각 사람의 형편과 처지를 누구보다 잘 아시는 주님께서, 오늘 나에게 꼭 필요한 위로와 응답으로 찾아와 주시옵소서. 성령님께서 우리 마음을 주장하사, 이 말씀이 단순한 지식이 아니라 내 삶을 이끄는 능력이 되게 하여 주시고, 주님의 뜻을 선명하게 발견하는 복된 시간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감사하며 기도드립니다. 아멘. 할렐루야! 사랑하는 성도님들. 함께 예배 드리게 되어 반갑고 감사합니다. 우리는 지난 시간에 창세기 22장 전반부의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자신을 따르던 종들에게 "나와 아이는 저기 가서 경배한 다음 너희에게 돌아오겠다” 라고 말한 후에, 종들을 남겨두고 이삭과 단둘이 산을 오르기 시작했습니다. 오늘은 바로 그 뒤로 이어지는 말씀을 이어가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6절은 이어지는 장면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번제에 쓸 나무를 자기 아들 이삭의 등에 지웠습니다. 자기는 불과 칼을 들고 둘이 함께 걸어갔습니다.” 이삭의 어깨 위에는 잠시 후면 자기 자신의 몸을 불태우게 될 나무가 짊어져 있습니다. 그리고 그 뒤를 따라가는 아브라함의 두 손에는 사랑하는 아들의 가슴을 찌를 칼과 아들의 몸을 태울 불이 들려 있습니다. 아마도 아무런 대화도 없이 무겁고 숨 막히는 침묵이 흘렀겠죠. 이 장면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다른 의미가 있습니다. 아버지가 지워준 죽음의 나무를 등에 지고 묵묵히 언덕을 오르는 이삭의 모습은, 훗날 온 인류의 죄악이라는 무거운 십자가 나무를 등에 홀로 지고 골고다 언덕을 오르실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보여주는 구속사적인 그림자입니다. 이삭은 자신이 짊어진 그 무거운 나무가 바로 자신을 태울 번제단이 될 줄은 꿈에도 모른 채, 그저 아버지를 철저히 신뢰하며 뒤를 따르고 있습니다. 그때, 정적을 깨고 아들 이삭이 묻습니다. 7절입니다. 이삭이 자기 아버지 아브라함에게 말을 걸었습니다. “아버지.” 아브라함이 대답했습니다. “왜 그러느냐, 내 아들아?” 이삭이 말했습니다. “불과 나무는 여기 있는데 번제로 드릴 양은 어디 있나요?” 그리고 이 절망적인 아들의 질문 앞에 아브라함은 찢어지는 듯한 고통 속에서도, 흔들림도 없이 대답합니다. 8절입니다. 아브라함이 대답했습니다. “내 아들아, 번제로 드릴 양은 하나님께서 친히 준비하실 것이다.” 두 사람은 함께 계속 길을 갔습니다. 이 대답은 아들의 불안을 달래기 위해 억지로 둘러대는 거짓말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과 그분의 선하심을 확실하게 신뢰했던 것이죠. 생명의 주관자이신 하나님께서 반드시 생명의 길을 내실 것이라는 절대적인 신뢰의 고백이었습니다. 마침내 두 사람은 하나님이 지시하신 장소에 도착했습니다. 9절에 보면 아브라함은 묵묵히 그곳에 제단을 쌓았습니다. 나무를 하나 하나 올려 놓을 때 마다 자신의 생명보다 귀한 아들, 인생의 모든 기쁨이자 가문의 미래인 이삭에 대한 집착과 소유욕을 하나 하나 내려놓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제단이 완성되자, 그는 이삭을 단단히 묶어서 제단의 나무 위에 눕힙니다. 성서학자들에 따르면 이때 이삭의 나이는 어린아이가 아니었습니다. 번제에 쓸 나무를 직접 지고 산을 오를 만큼 건장한 청년이었을 것이라고 합니다. 반면 아브라함은 100세가 넘은 힘없는 노인입니다. 노인의 완력으로 혈기 왕성한 청년을 강제로 제압하고 밧줄로 묶을 수는 없었겠죠. 이삭은 아버지가 밧줄을 들고 눈물을 쏟으며 자신에게 다가올 때, 아, 아버지가 말씀하신 그 제물이 바로 나구나 하면서, 모든 상황을 직감했을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삭은 도망가거나 아버지에게 힘으로 반항하지 않았죠. 자신을 묶는 늙은 아버지의 거친 손길을 거부하지 않고, 기꺼이 죽음의 제단 위에 눕는 이삭의 순종은 참으로 놀랍습니다. 번제란 짐승의 각을 뜨고 불태워서 온전히 바치는 제사입니다. 이삭은 자신이 제물이 되어서 칼에 찔리고 불에 타야 한다는 두려운 사실 앞에서도 침묵으로 순종합니다. 이것은 단순히 늙은 아버지에 대한 효심을이 아니라, 아버지 아브라함이 평생을 다해 믿고 섬겨온 그 하나님을 이삭도 깊이 신뢰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아름다운 순종의 모습은 훗날 겟세마네 동산에서 "아버지여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라고 하시며 기꺼이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신 예수 그리스도의 순종을 떠올리게 합니다. 이제 모든 준비가 끝났습니다. 10절입니다. 아브라함이 손에 칼을 들고 아들을 죽이려고 했습니다. 아브라함이 떨리는 손으로 칼을 단단히 고쳐 잡고, 자신의 분신과도 같은 사랑하는 아들의 심장을 향해 내리치는 그 순간, 다급한 목소리가 하늘로부터 들려옵니다. 11절과 12절입니다. 그때 여호와의 천사가 하늘에서 아브라함을 불렀습니다.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그가 대답했습니다. “제가 여기 있습니다.” 천사가 말했습니다. “그 아이에게 손대지 마라. 그에게 아무것도 하지 마라. 네가 네 아들, 곧 네 외아들까지도 내게 아끼지 않았으니 이제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을 내가 알았노라.” 성도님들. 모든 것을 다 아시는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마음과 믿음을 모르셨기 때문에, 알아보기 위해 이런 잔인하고 가학적으로 보이는 시험을 하셨던 것일까요? 현대의 무신론자들은 이 본문을 보며 하나님을 향해 '자녀 살해를 명령하는 비윤리적인 폭군'이라고 비난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의 구속사적 의도를 전혀 깨닫지 못한 입장인 것이죠. 하나님께서 모리아 산에서 진정으로 원하신 것은 이삭의 피가 아니었습니다. 약속으로 주신 이삭의 생명을 다시 빼앗는 것이 목적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토록 확인하고 싶으셨던 것, 그리고 무엇보다 아브라함 스스로가 깨닫기를 원하셨던 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최고의 선물인 이삭이, 아브라함의 마음속에서 거대하게 자라나서, 정작 그 생명의 선물을 주신 하나님보다 더 높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지는 않은지, 즉 이삭이 하나님을 대체하는 치명적인 우상이 되어버리지는 않았는지를 묻고 계신 것입니다. 타락한 인간의 마음은 쉴 새 없이 헛된 우상을 만들어내는 우상 공장과 같다 라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는 흔히 어떤 모양을 가진 형상이나, 더러운 탐욕 같은 것만을 우상이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일상 속에서 우리가 집착하며 섬기는 우상은 대개, 하나님이 은혜로 허락하신 '아주 좋은 것들'인 경우가 많습니다. 사랑하는 자녀들, 건강, 재산, 사람들의 인정과 칭찬, 이 모든 것은 그 자체로는 악한 것이 아니라 선하고 아름다운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 좋은 것들을 대할 때, 이것이 없으면 내 인생은 무의미하고 실패한 것이다 라고 집착하며 그것에 목숨을 거는 순간, 그 선하고 좋은 선물은 우리를 파괴하고 조종하는 우상이 되어버립니다. 100세에 얻은 유일한 희망이었던 이삭이 바로 아브라함에게 그러한 우상으로 전락할 가장 큰 위험요소였던 것입니다. 천사가 아브라함에게 "이제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을 내가 알았노라."라고 했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진정한 '경외'란 심판받을까봐 벌벌 떠는 공포의 감정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내 마음속에 하나님보다 더 소중하게 여기고 절대적인 가치로 여기는 것이 단 하나도 없는 온전함의 상태, 하나님 한 분만으로 내 영혼이 최고로 만족하고 기뻐하는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의 질서가 회복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13절입니다.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보니 숫양 한 마리가 덤불에 뿔이 걸려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은 가서 그 양을 잡아 자기 아들 대신 번제물로 드렸습니다. 숫양은 도대체 언제부터 그 덤불에 걸려 있었을까요? 아브라함이 삼 일 동안 피눈물을 삼키며 무거운 발걸음으로 산을 오르고 있을 때, 하나님은 아무 일도 안하고 구경만 하신 것이 아닙니다. 이미 아브라함과 이삭을 살리기 위해 숫양을 준비하셨던 것입니다. 인간의 좁은 눈에는 도무지 피할 길이 보이지 않는 벼랑 끝인 줄 알았지만, 하나님의 계획은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숫양을 가져다가, 기쁨과 감사의 번제로 드렸습니다. 그리고 14절에 기록된 대로 그 놀라운 구원과 은혜의 장소를 여호와 이레, 즉 "여호와의 산에서 준비될 것이다"라고 불렀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이 사순절 기간에 오늘 우리가 마주한 이 사건을 단순히, 가장 소중한 것을 바치려 했더니 , 하나님이 감동하셔서 아들도 살려주시고 덤으로 더 큰 복을 주셨다 라고만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우리가 이 본문을 그런 시각으로 해석한다면, 하나님은 내가 소중히 여기는 돈이나 건강이나 자녀를 언제든지 뺏어갈 수 있는 몹시 가학적이고 두려운 대상으로 전락하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는 내 소유를 빼앗기지 않기 위해 끊임없이 하나님과 불안한 거래를 하려 들 것이고, 남들과 비교하며 원망과 불평의 굴레에서 평생 벗어나지 못하게 됩니다. 성경이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여호와 이레의 참된 본질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만약 우리의 신앙생활이 단순히, 내가 이만큼 정성을 바치면, 하나님이 저만큼 채워주신다는 공식이라면, 우리는 평생 두려움과 불안 속에서 살아야 합니다. 혹시 내가 이번 달에 십일조를 덜 해서 사고가 났나?, 내가 기도를 쉬어서 이런 병에 걸렸나? 하면서 내 삶에 찾아오는 모든 고난을 내 헌신이 부족한 탓으로 돌리는 무서운 율법주의의 노예가 되고 맙니다. 여호와 이레는 우리의 헌신과 정성을 조건으로 하나님의 보상을 이끌어내는 요술 램프같은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의 자격이나 공로와는 무관하게, 창세 전부터 자기 백성을 구원하시기 위해 완벽한 대속 제물을 친히 준비해 놓으신 하나님의 일방적이고도 압도적인 은혜를 선포하는 복음의 핵심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죽음과 멸망 받아 마땅한 우리 죄인들을 대신할 다른 천사나 짐승을 예비하지 않으셨습니다. 창세 전부터 사랑하셨던 당신의 유일하신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지고 피를 흘리며 골고다 언덕을 오르실 때, 하나님은 천군 천사를 보내셔서 그 끔찍한 고난의 길을 막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이 양손과 양발에 대못이 박힌 채,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라고 피를 토하며 절규하실 때, 하나님은 철저히 침묵하셨습니다. 모리아 산에서 아들을 향해 들었던 아브라함의 칼은 하나님의 다급한 은혜의 음성으로 멈추었지만, 우리의 죗값을 심판하시고 세상을 구원하시기 위해 높이 드신 하나님의 진노와 공의의 칼은 멈추지 않고, 자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에 꽂혔습니다. 우리 죄의 그 끔찍하고 더러운 저주를 온몸으로 짊어지신 예수님은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여호와의 참된 어린 양이 되셔서, 십자가에서 남김없이 피와 물을 쏟으심으로 온전한 대속의 제물이 되셨습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여호와 이레는 우리를 번창하게 해 주시고, 건강을 회복케 하시는 그런 정도의 축복이 아닙니다. 나를 살리시기 위해 대신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은혜가 여호와 이레의 궁극적이고 완전한 성취인 것입니다. 이제 19절을 보시면 번제를 마치고 아브라함과 이삭이 종들에게로 돌아옵니다. 겉보기에는 아무것도 달라진 것이 없습니다. 이삭은 여전히 살아서 아브라함 곁에서 묵묵히 걸어 내려오고 있습니다. 그러나 산을 오를 때의 아브라함과, 산을 내려가는 아브라함은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었습니다. 아브라함에게 산을 오를 때의 이삭은 자신의 목숨처럼 꽉 붙들고 내 힘과 능력으로 지켜내야만 했던 나의 소유물이었으며, 잃어버릴까 봐 불안해 하며 영적인 눈을 멀게 만드는 우상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은혜로 죽음의 문턱에서 다시 돌려받은 이삭은, 이제 더 이상 아브라함이 자기 마음대로 조종하고 간섭할 수 있는 아브라함의 것이 아닌 것이죠. 아브라함은 산을 내려오며 깊이 깨달았을 것입니다. 내 힘과 노력으로 이 아이의 미래를 지키고 내 뜻대로 통제할 수 있는 것이 결코 아니었구나. 내가 억지로 움켜쥔다고 지켜지는 것이 아니라, 죽은 자도 능히 다시 살리시는 여호와 이레의 하나님만이 이 아이의 진짜 주인이시며, 내게 잠시 은혜로 맡겨주신 선물이구나 라고 깨닫게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오늘 우리가 말씀 속에서 만난 여호와 이레의 하나님은 우리가 소중히 여기는 것들을 억지로 빼앗아가시는 분이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가 불안과 두려움 때문에 우상들을 꽉 움켜쥐고 있는 그 손을, 십자가의 은혜로 펴게 하시고, 그 손에 하나님의 참된 평안과 생명, 그리고 세상이 결코 빼앗아갈 수 없는 참된 자유를 넘치도록 채워 주시는 분일줄로 믿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것을 빼앗기 위해 달라고 하시는 것이 아니라, 진짜 영원한 것을 주시기 위해 우리의 손을 비우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 눈에는 당장 나를 짓누르고 괴롭히는 고난과 문제만 크게 보입니다. 그래서 말씀을 듣고 다짐했다가도 집으로 돌아가면 다시 우상을 붙잡고 넘어지고 실패할 때도 많습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 역시 처음부터 완벽한 믿음의 소유자가 아니었습니다. 살기 위해 아내를 누이라고 속이는 거짓말도 했고, 하나님의 약속을 기다리지 못하고 여종을 통해 아들을 얻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 오랜 세월 동안 하나님은 그를 포기하지 않으셨고, 아브라함 역시 하나님과 깊이 교제하며 끊임없이 순종을 훈련받았습니다. 롯과의 갈등에서도, 그리고 이스마엘을 떠나보내는 뼈아픈 순간에도, 순종을 실천하며 하나님을 의지하는 법을 배웠기 때문에, 결국 모리아 산 정상에서 온전한 순종의 꽃을 피울 수 있었던 것입니다. 움켜쥔 손을 펴고 내가 그토록 아끼는 우상을 내려놓는 일은 결코 쉽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 두려움을 깨고 믿음으로 나의 가장 소중한 이삭을 제단 위에 올려놓을 때, 비로소 우리는 나를 옭아매고 있던 모든 우상에게서 벗어나 하나님이 주시는 평안과 참된 자유를 맛보게 됩니다. 성도님들. 우리의 믿음의 여정은 100미터 달리기 시합이 아니라 평생을 걸쳐서 빚어져 가는 마라톤과 같습니다. 오늘 당장 내려놓아야 할 것을 내려놓지 못한다고 해서 스스로를 정죄할 필요는 없습니다. 하나님은 백 세가 될 때까지 수없이 흔들리고 의심하고 넘어졌던 아브라함을, 끝까지 사랑과 인내로 품으시고 결국에는 위대한 믿음의 조상으로 만들어 가셨습니다. 우리가 매 순간 넘어질지라도, 우리의 실패보다 우리를 이끄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훨씬 더 큰 줄로 믿습니다. 우리의 연약함을 책망하지 않으시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로 우리의 믿음을 자라게 하시는 성령님 의지하며 어제보다 오늘 조금 더, 오늘보다 내일 조금 더 내 손에 쥔 것들을 내려놓고 주님을 신뢰하는 연습을 거듭해 보시길 바랍니다. 그리하여 하나님 한 분만으로 만족하는 참된 신앙의 승리를 경험하는 복된 우리 모두가 되길 간절히 축원합니다. <마무리 기도> 사랑의 하나님, 그 크신 십자가 사랑을 깨닫게 하시니 감사드립니다. 우리는 어리석게도 주님이 주신 것들을 우상으로 붙잡고, 그것들을 잃을까 두려워하며 살아왔습니다. 불안에 떨며 움켜쥐었던 고집스러운 두 손을 이제 십자가 앞에 폅니다. 고난의 사흘 길을 걷는 듯한 상황에 있을지라도 예비하신 여호와 이레의 은혜를 기대하며 믿음으로 걷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감사하며 기도드립니다. 아멘. 찬양 : 370장 / 주 안에 있는 나에게 폐회 : 주기도문 |
|||||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