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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6년 2월 11일 수요예배 | 운영자 | 2026-02-11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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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2-11 수요 예배 예배로의 부름 : 시편 32:7-9 7) 주는 내 피난처이십니다. 주께서 나를 모든 고난에서 보호하시며 구원의 노래로 나를 감싸실 것입니다. 8) 주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너를 지도하고 네가 가야 할 길을 가르치며 너를 내 눈으로 인도하리라. 9) 너는 말이나 노새처럼 되지 마라. 그것들은 아는 게 없고 재갈과 굴레로 제어하지 않으면 가까이 오지 않는다”라고 하셨습니다. 예배 기원 사랑과 은혜가 풍성하신 아버지 하나님. 특별할 것 없는 하루를 보내고 이 자리에 모였습니다. 세상은 더 크고, 더 높고, 더 많은 것을 향해 달려가지만, 주님은 우리의 작은 신음과 사소한 몸짓 하나도 놓치지 않으시고 지켜보시는 분임을 믿습니다. 평범한 일상이지만, 오늘 하루 주님을 생각하며 견뎌낸 우리의 작은 믿음을 주님께서 기뻐받으시는 줄로 믿습니다. 거창한 다짐보다 소박한 진심을 담아 드리는 예배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신앙고백 : 사도신경 찬양 : 406장 / 곤한 내 영혼 편히 쉴 곳과 기도인도 : 연재관 목사 성경 봉독 : 창세기 22장 1-19절 설교 : 은혜가 은혜되게 말씀을 위해 함께 기도드리겠습니다. 사랑과 은혜가 풍성하신 아버지 하나님. 오늘 주시는 말씀이 우리의 삶에, 등불이 되어 주시옵소서. 내가 가야 할 길이 어디인지, 멈춰야 할 곳이 어디인지 선명하게 보여주시기를 원합니다. 막연한 위로를 넘어, 내일을 살아낼 지혜와 용기를 얻는 시간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감사하며 기도드립니다. 아멘. 할렐루야! 말씀을 사모하여 이 수요예배의 자리로 나오신 여러분.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오늘도, 하나님의 예비하신 은혜가 풍성히 임하기를 소망합니다. 우리는 지난 시간까지 아브라함과 사라에게 임한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살펴보았습니다. 불가능한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께서는 약속하신 대로 아들 이삭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본문의 바로 앞장인 21장을 보면, 이삭이 자라 젖을 떼는 날에 아브라함이 큰 잔치를 베푸는 장면이 나옵니다. 현대인들에게 아이의 돌잔치나 생일 파티는 축하의 의미가 크지만, 당시에는 유아 사망률이 매우 높았기 때문에, 아이가 태어나도 2~3년을 넘기지 못하고 죽는 경우가 많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아이가 젖을 떼고 밥을 먹기 시작했다는 것은, 이 아이가 앞으로 우리 곁에 머무는구나 하는 확신을 주는 사건이었습니다. 그러니 100세에 얻은 아들이 건강하게 자라서 젖을 떼었을 때, 아브라함의 기쁨은 말 할 수 없었겠죠. 그러나, 인생이라는 것이 참 묘합니다. 가장 행복하고 완벽해 보이는 그 잔치의 날에, 예기치 못한 상황이 발생합니다. 우리가 잠시 잊고 있었던 인물, 이스마엘이 등장합니다. 이 잔치에서 이스마엘이 어린 이삭을 놀리는 모습을 사라가 목격하게 되고, 화가 난 사라는 아브라함에게 이 여종과 이스마엘을 쫓아내라고 요구하게 되죠. 아브라함은 고민에 빠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스마엘은 이삭이 태어나기 전까지 아브라함의 사랑을 독차지했던 아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성도님들. 아브라함이 이스마엘 문제로 근심했다는 것은 단순히 부성애 때문만은 아니었을지도 모릅니다. 어떤 주석가들은 아브라함의 근심을 조금 더 현실적인 관점에서 해석하기도 하는데요. 아브라함에게 이스마엘은 일종의 보험 같은 것이었다 라는 것입니다. 이삭은 아직 너무 어리고 연약합니다. 앞으로 무슨 일이 생긴다면, 다 자란 이스마엘이라도 있어야 대가 끊기지 않겠죠. 그러니 아브라함에게는 두 아들 모두가 필요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근심하지 말고 내보내라고 하십니다. 이것은 무슨 뜻일까요? “아브라함아, 양다리 걸치지 마라. 너의 미래는 이스마엘이라는 대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나 여호와에게 있다”라는 하나님의 말씀이었습니다. 하나님만 전적으로 의지하라는 것이죠. 결국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합니다. 자신과 이삭의 미래, 그리고 쫓겨나는 이스마엘의 미래까지도 온전히 하나님께 맡긴 것입니다. 큰 산을 하나 넘었습니다. 그렇게 자녀 문제가 해결되는가 싶었는데,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엄청난 말씀을 하십니다. 창세기 22:2 2) 여호와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네 아들, 네가 사랑하는 네 외아들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지시하는 산에서 그를 번제물로 바쳐라.” 하나님은 분명, 이스마엘은 아니다. 이삭이다 라고 못 박으셨던 분입니다. 그런데 이제 와서, 이삭도 아니다. 나를 붙들라 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만 믿고, 하나님만 사랑하라는, 인간적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요구를 하십니다. 사랑하는 아들을 번제로 바치는 그 순간까지도, 과연 주님을 전적으로 신뢰할 수 있는지를 묻고 계시는 것입니다. 오늘 이 본문을 보면서 우리가 흔히 범하는 시험에 대한 오해를 먼저 풀어야 합니다. 오늘 아브라함은 인생 최고의 시험을 당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흔히 하나님이 우리를 시험하실 때, 우리가 얼마나 잘하는지 보자, 순종하나 안 하나 지켜보자 라는 식으로, 우리의 반응을 테스트하기 위해 시험을 주신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이 어떻게 반응할지, 이삭을 번제단 위에 올려놓을지 아닐지, 정말 칼로 찌를지 아닐지 모르셨을까요? 아닙니다.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신 분입니다. 모든 것을 다 아십니다. 아브라함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닥쳐오는 시험 속에서 우리가 어떻게 반응할 것인지도 이미 다 알고 계십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믿음의 시험을 주시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하나님을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를 위해서입니다. 이 시험을 통해 하나님께서 지금까지 어떻게 인도하셨는지, 내 안에 어떤 믿음을 심어주셨는지를 우리에게 보여주시기 위함입니다. 오늘 본문을 기준으로 한다면, 갈대아 우르에서 아브라함을 부르신 그 순간부터 오늘 모리아 산에 이르기까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어떻게 이끄시고, 성장시켜 오셨는지를 아브라함 본인이 깨닫게 하시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시험을 당할 때 그저, 통과해야 한다는 압박감을 가집니다. 하지만 시험의 진정한 목적은, 우리가 그 시험을 멋지게 통과하든, 아니면 넘어지든 간에, 그 과정을 통해 나의 영적 상태를 직시하게 하는 데 있습니다. 나의 진정한 문제가 무엇인지, 내 믿음의 현주소가 어디인지, 그리고 내가 하나님을 얼마나 의지하고 있는지를 깨닫게 되는 것, 그것이 시험의 목적입니다. 미래를 다 아시는 하나님께서 단순히 우리의 반응을 구경하시려고 일부러 아들을 바치라고 하실 이유는 없는 것입니다. 본문 2절을 다시 보시면, 하나님께서는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고 하셨습니다. 말씀에는 아브라함의 심정 묘사가 생략되어 있지만, 아브라함으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말씀이었을 것입니다. 전혀 설명이 없으셨으니까요. 왜 이삭을 죽여야 하는지, 왜 지금이어야 하는지 아무런 설명도 없이 그냥 드리라고 하십니다. 또한 지금까지 경험한 하나님의 성품과 맞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실수를 해도 용서해주시는 분이셨고, 무엇보다 우상숭배자들이 행하는 인신 제사를 가증히 여기시는 분이십니다. 그런데 지금 하나님은 이방 신들과 똑같은 요구를 하고 계십니다. 그동안 경험했던 하나님과는 너무나 다른 낯선 명령입니다. 마지막으로, 하나님의 약속과 오늘 이 명령이 충돌합니다. 하나님은 분명히 이삭을 통해 네 자손이 번성할 것이라고 약속하셨는데, 지금은 이삭을 죽이라고 하십니다. 이해할 수 없는 상황, 너무나 낯선 하나님의 모습, 충돌하는 약속과 명령. 이 속에서 아브라함은 혼란스러웠을 것입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아브라함은 순종하죠. 이해할 수 없었지만, 그는 하나님의 선하심과 의로우심을 신뢰했습니다. 그 믿음의 상태가 본문 5절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창세기 22:5 5) 그가 하인들에게 말했습니다. “너희는 나귀를 데리고 여기 있으라. 나와 아이는 저기 가서 경배한 다음 너희에게 함께 돌아오겠다.” 여기서 아브라함은, 내가 돌아오리라가 아니라, 나와 아이가 함께 돌아오겠다고 말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것이 종들을 안심시키기 위한 아브라함의 거짓말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히브리서 기자는 이 장면을 전혀 다르게 해석합니다. 히브리서 11장 17절에서 19절 말씀을 보면, 이때 아브라함의 마음이 어떠했는지 정확히 알 수 있습니다. 히브리서 11:17-19 17)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 이삭을 바쳤습니다. 그는 약속들을 받은 사람이면서도 자기 외아들을 기꺼이 바치려 했습니다. 18) 하나님께서 전에 말씀하시기를 “네 자손이라고 불릴 사람은 이삭으로 말미암을 것이다”라고 하셨습니다. 19)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죽은 사람도 살리실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므로 비유로 말하자면 그는 이삭을 죽은 사람들로부터 돌려받은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이미 기적을 체험한 사람입니다. 100세가 되어 죽은 것과 같은 몸에서 이삭을 태어나게 하셨습니다. 그렇기에 그는 믿었습니다. 죽은 몸에서 생명을 주신 하나님이라면, 내가 이삭을 번제로 드려 재가 된다 할지라도, 하나님은 능히 다시 살리셔서 약속을 지키실 것이다. 이삭을 죽이라는 명령과 이삭을 통해 복을 주시겠다는 약속이 어떻게 조화를 이룰지 인간의 머리로는 알 수 없었지만, 그는 믿음을 가지고 순종의 길을 걸어갔던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이 말씀 앞에 우리를 비추어 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흔히 은혜 받았다라고 말할 때, 세상에서 잘 사는 것, 편안한 것, 성공하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은 기준을 들이댑니다. 성도의 은혜가 고작 세상 사람들이 추구하는 복과 같은 것뿐인가 하는 의문이 듭죠. 우리가 목숨 걸고 구해야 할 은혜가 과연 그런 것들일까요? 돈 좀 많이 벌면 은혜 받았다고 하고, 자녀가 좋은 대학에 합격하면 은혜 받았다고 합니다. 은혜라는 말이 마치 좋은 일들을 표현하는 관용구처럼 아주 가볍게 쓰이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진정한 은혜를 받기까지,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얼마나 큰 고난을 당하셨고 보혈을 흘리셨습니까? 우리는 그 엄청난 대가는 아랑곳하지 않고, 세상에서 잘 먹고 잘 사는 것으로 은혜의 내용을 채우고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 봐야 합니다. 우리는 흔히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그 어떤 것을 은혜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성경은 그것 자체로는 아직 은혜가 아니라고 말하는데요. 은혜에 관련해서 우리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예화가 하나 있습니다. 예수님이 어떤 성을 지나가시는데, 한 청년이 술에 취해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사람들에게 시비를 걸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다가가 물으셨습니다. “이보게 청년, 왜 이렇게 사나?” 그러자 청년이 대답합니다. “예수님, 저 모르시겠어요? 제가 앉은뱅이였는데 예수님이 일으켜 주셨잖아요! 다리가 멀쩡해지니 갈 곳이 너무 많아졌어요. 이 튼튼한 다리로 세상 즐기느라 이렇게 살고 있습니다. 이게 다 예수님 은혜입니다!” 예수님이 또 길을 가시는데, 야한 옷을 입은 여인이 한 청년을 유혹하여 데리고 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예수님이 그 청년에게 묻습니다. “자네는 왜 이 여인을 따라가는가?” 청년이 말합니다. “예수님, 저 모르세요? 제가 앞을 보지 못할 때 예수님이 눈을 뜨게 해 주셨잖아요. 눈을 뜨고 보니 세상에 이렇게 아름답고 자극적인 게 많은 줄 몰랐어요. 그래서 인생을 좀 즐기고 있습니다.” 내친김에 여인에게도 묻습니다. “여인이여, 왜 타락한 삶을 사는가?” 여인이 대답합니다. “예수님이 저를 정죄하지 않으신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용서받은 은혜로 이제 제 맘대로 자유롭게 사는 거예요.” 여러분, 이 예화가 좀 불편하게 느껴지십니까? 하지만, 이것은 저와 여러분의 모습일 수 있습니다. 이 이야기는 우리가 은혜를 얼마나 잘못 이해하고 있는지, 하나님의 피 묻은 은혜를 얼마나 값싼 것으로 생각하는지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주신 병 고침, 성공, 돈, 명예를 은혜라고 말하며 좋아합니다. 하지만 그것이 진짜 은혜인지, 아니면 우리를 망치는 독인지, 그때는 아직 모릅니다. 앉은뱅이에게 가장 큰 은혜는 일어서는 것입니다. 맹인에게 가장 큰 은혜는 앞을 보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기적이 그들에게 주어졌을 때, 그것이 진정 그들의 영혼에 은혜가 되었습니까? 아닙니다. 그들은 선물에 취해 선물을 주신 예수님을 떠났습니다. 건강해진 다리로, 밝아진 눈으로 죄를 지었습니다. 결과적으로 그 선물은 그들에게 저주가 되었습니다. 아브라함에게 있어서 가장 필요한 은혜는 아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삭을 주셨을 그 시점에, 이삭이 아브라함에게 진정한 은혜인지 아닌지는 아직 결정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삭을 바치라고 하셨을 때, 만약 아브라함이, 안됩니다. 이건 내 겁니다. 주셨으면서 됐지 왜 뺏어가십니까? 라고 움켜쥐었다면 어떻게 됐을까요? 그랬다면 이삭은 아브라함에게 은혜가 아니라, 평생 하나님과 아브라함 사이를 가로막는 우상이자 짐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달라 하실 때 기꺼이 드림으로써, 이삭을 진짜 은혜로 만들었습니다. 그는 선물인 이삭에게 매인 것이 아니라, 선물을 주신 하나님께 집중했습니다. 나같이 늙은 자에게도 아들을 주신 하나님, 그 능력의 하나님이라면 이삭을 데려가셔도 또 다른 길을 여실 것이다. 이 믿음이 있었던 것이죠. 사랑하는 성도님들. 우리에게 진정 은혜가 되는 것은 내가 받은 그 어떤 것이 아닙니다. 그것을 통하여 내가 얼마나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갈 수 있느냐에 따라 그것이 은혜가 되기도 하고 재앙이 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은혜는 더 좋은 것을 받아서 누리는 상태가 아닙니다. 은혜는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바라볼 수 있는, 믿음의 문제입니다. 그래서 믿음이 가장 큰 은혜인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것이 가장 큰 은혜인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을 알게 만들고, 하나님을 더욱 의지하게 만드는 내 삶의 모든 상황 자체가 은혜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자기가 느끼기에 좋고 즐거운 것만을 은혜라고 여깁니다. 하지만 성도는 다릅니다. 성도는 모든 것이 은혜일 수 있습니다. 억울한 일을 당할 때도, 그 억울함 때문에 주님을 찾게 된다면 그것은 은혜입니다. 경제적으로 어려울 때도 그것 때문에 주님만 의지하게 된다면 그것은 부요하며 주님을 찾지 않는 것보다 더 큰 은혜입니다. 병들어 누워 있을 때, 사업이 실패했을 때, 그 고통의 자리가 나를 하나님께로 인도한다면 그곳이 바로 은혜의 자리입니다. 이 역설을 깨닫는 것이 성도입니다. 모리아 산에서 아브라함이 이삭을 드리려 했을 때, 하나님은 수풀에 걸린 숫양을 준비해 주셨습니다. 이삭 대신 숫양이 죽었습니다. 그러고, 아브라함이 섰던 바로 그 모리아 산줄기, 골고다 언덕에서 하나님은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버리셨습니다. 아브라함에게는 멈추라고 하셨지만, 하나님은 당신의 아들에게 쏟아지는 심판을 멈추지 않으셨습니다. 이삭은 살았지만, 예수님은 죽으셨습니다. 죽어야 마땅한 저와 여러분을 살리기 위해서입니다. 우리를 위해 자신의 가장 소중한 독생자까지 아끼지 않으신 그 사랑, 그분이 바로 우리의 영원한 ‘여호와 이레’이십니다. 여러분들의 삶의 자리에서 진짜 은혜를 얻으시기를 바랍니다. 그 은혜는 물질도, 자녀도, 성공도 아닙니다. 은혜는 하나님 그 자체인 줄로 믿습니다. 즐겁고 좋은 자리가 있다면 그 선물에 취해 살지 마십시오. 그것을 통하여 하나님께로 나아갈 때 그 자리가 은혜의 자리인 것입니다. 눈물 흘리고 고통받는 자리에 있으시다면, 그 고통을 통해 나를 부르시는 하나님께로 나아가, 그 자리를 은혜의 자리로 만드는 여러분들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마무리 기도> 사랑과 은혜가 풍성하신 아버지 하나님. 어려움만 있을 뿐, 은혜가 없다고 생각했던 내 삶의 자리가 하나님을 바라보는 은혜의 자리로 변화되기를 소망합니다. 내가 붙잡고 있던 하나님을 잊게 만드는 것들, 주님 발 앞에 내려 놓게하여 주시옵소서. 내가 움켜쥐는 인생이 아니라, 은혜 그 자체이신 하나님을 바라보며, 주님께 맡기는 인생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감사하며 기도드립니다. 아멘. 찬양 : 369장 / 죄짐 맡은 우리 구주 폐회 : 주기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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