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예배 말씀/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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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예배 말씀/주보
2026년 2월 4일 수요예배 운영자 2026-0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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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2-04 수요 예배


예배로의 부름 : 시편 16:1, 8-9
1) 오 하나님이여, 내가 주를 신뢰합니다. 나를 지켜 주소서.
8) 내가 여호와를 항상 내 앞에 모셔 둡니다.
주께서 내 오른쪽에 계시니 내가 흔들리지 않을 것입니다.
9) 그러므로 내 마음이 기쁘고 뛸 듯이 즐거워하며 내 몸도 안전할 것입니다.

예배 기원
사랑과 은혜가 풍성하신 하나님.
지난 3일간도 저희는 작은 문제들에 일희일비하며 마음의 중심을 잡지 못하고 비틀거렸습니다.
2월을 시작하며, 다시금 우리의 시선을 세상의 파도가 아닌 흔들리지 않는 반석이신 주님께 고정합니다.
이 저녁, 주님이 우리 오른편에 계심을 믿는 믿음을 더하여 주시옵소서. 상황은 변해도 주님은 변하지 않으시니, 우리의 마음이 불안을 넘어 기쁨과 안전함을 누리는 평안의 예배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감사하며 기도드립니다. 아멘.

신앙고백 : 사도신경

찬양 : 91장 / 슬픈 마음 있는 사람

기도인도 : 서정애 목사

성경 봉독 : 창세기 21장 1-7절

설교 : 멈춰버린 시간 위로 쏟아진 은혜의 웃음

말씀을 위해 함께 기도드리겠습니다.
사랑과 은혜가 풍성하신 아버지 하나님.
흔들리는 세상 속에서 우리가 붙잡아야 할 진리를 말씀하여 주시옵소서.
복잡한 생각으로 어지러운 머릿속을 주님의 말씀으로 바로 잡아 주시옵소서.
이 말씀이 우리 삶의 단단한 기둥이 되어, 어떤 바람에도 쓰러지지 않고 버텨낼 수 있는 힘을 공급하여 주실 줄 믿사오며, 예수님의 이름으로 감사하며 기도드립니다. 아멘.

할렐루야!
오늘도 변함없는 사랑으로 우리를 부르시고, 예배의 자리로 불러주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오늘 이 시간, 주님이 주시는 하늘의 위로가 여러분의 심령에 가득하시길 소망합니다.

우리가 함께 읽은 창세기 21장은 매우 감격스러운 장면인데요. 드디어, 아브라함과 사라에게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그 아들이 주어지는 순간입니다. 장장 25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희망과 절망 사이를 오가며 애태웠던 그 기다림 끝에, 마침내 하나님의 약속이 현실이 되는 기적의 현장입니다. 이 기적의 현장에 도달하기까지의 과정을 좀 보면…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겪는 가장 힘겨운 것들 중 하나는 바로 하나님의 약속과 내 현실 사이의 괴리감을 견뎌내는 일입니다. 성경은 분명 우리에게 축복을 약속합니다. 내가 너를 지키리라,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구하는 자에게 주시리라. 우리는 이 말씀에 아멘으로 화답하며 예배당을 나섭니다.

그러나 정작 우리가 마주하는 현실은 통장 잔고는 여전히 비어 있고, 자녀의 문제는 해결될 기미가 보이지 않으며, 병원 검사 결과는 우리를 낙심하게 만듭니다. 약속은 저 멀리 하늘에 떠 있는 구름 같은데, 내 현실은 발이 푹푹 빠지는 진흙탕 같습니다. 이 좁혀지지 않는 간격 때문에 우리는 괴로워하고, 때로는 시험에 듭니다.

우리는 살면서 여러 사람들에게 속아왔습니다. 정치인들은 선거철마다 공약을 남발하고, 누군가는 확실한 수익을 장담하며 자신을 믿으라고 합니다. 때로는 가장 가까운 가족들조차, 그동안 했던 약속들을 저버린곤 합니다.

사람은 약속을 지킬 마음이 있어도 능력이 부족해서 못 지키기도 하고, 때로는 죄성 때문에 의도적으로 약속을 어기기도 합니다. 우리는 그런 경험들이 쌓이고 쌓여서, 누군가의 약속을 온전히 신뢰하지 못하는 상태로 상대방을 바라보는 경우가 많죠.

그런데 중요한 문제는 우리가 하나님을 대할 때도, 마치 믿을 수 없는 사람을 대하듯 하나님을 대한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약속이 선포된 시점과 그것이 성취되는 시점 사이에, 도무지 납득할 수 없는 긴 침묵의 시간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네 자손이 하늘의 별과 같으리라 라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때가 75세였습니다. 그러나 현실은 어땠습니까? 1년이 지나고, 10년이 지나도, 무려 25년 동안이나 자식이 없었습니다.

이런 지루하고 긴 기다림 속에서, 우리 내면에는 아주 무서운 영적인 질병이 자라납니다. 바로 냉소라는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성도들이 마음속에 이 냉소라는 것이 있는데요. 냉소란 상처받지 않기 위해 미리 기대감을 차단해 버리는 마음의 방어기제입니다. 기대하지 않으면 실망할 일도 없다는 식의 태도인 것이죠. 뜨거운 열정도 없고, 차가운 거절도 없는 미지근한 불신앙입니다.

창세기 18장에서 하나님께서 “내년 이맘때 네게 아들이 있으리라”라고 말씀하셨을 때, 장막 뒤에 숨어 있던 사라는 속으로 웃었습니다. 그리고 그 웃음의 정체는 기쁨이 아니었죠. 하나님, 농담도 짓궂으시네요. 제 꼴을 좀 보세요. 이렇게 늙고, 가능성이 없어진지가 언젠데 이제 와서 아들이라니요?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세요.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보다 자신의 현실에 더 무게를 두는, 차갑고 건조한 비웃음, 냉소입니다.

혹시 지금 여러분의 마음 한구석에도 사라와 같은 냉소가 자리 잡고 있지는 않습니까? 교회에서는 아멘 하고 대답하지만, 세상에 나가서는, 어차피 인생은 내 힘으로 사는 거야. 기도는 기도고 현실은 현실이지 라며 마음을 닫고 계시지는 않습니까?

겉으로는 경건한 척하지만, 속으로는 하나님이 내 삶에 구체적으로 개입하실 것이라는 기대를 지워버린 채 살아가고 있지는 않으십니까? 이런 냉소는, 우리의 믿음이 자라나지 못하게 하고, 우리를 영적 무기력증에 빠뜨립니다.

여기서 우리는 아주 근원적인 질문을 던져야 합니다. 도대체 전능하신 하나님은 왜 25년이나 기다리게 하셨을까요? 말씀 한마디로 우주를 창조하신 분이 75세에 약속하시고 76세에 아들을 주셔도 됐을텐데. 아니면 늦어도 80세쯤에는 주셨어야 하지 않았을까? 라는 생각도 듭니다.

인간적인 생각으로는, 힘이 조금이라도 남아있을 때 주시는 것이 훨씬 효율적입니다. 그래야 아이를 낳고 키우기도 수월하겠죠.

그러나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100세가 되고, 사라가 90세가 될 때까지 기다리셨습니다. 성경은 이 상태를 “몸이 죽은 것 같다”라고 표현합니다. 의학적으로는 생식 능력이 완전히 끊어진 상태, 인간의 모든 가능성이 완벽하게 0%가 되어 있는 그 지점까지 하나님은 침묵하셨습니다.

이유가 무엇일까요? 아브라함과 사라로부터, 나는 할 수 없습니다. 내 힘으로는 불가능합니다 라는 완전한 항복 선언을 받아내기 위함입니다.

만약 아브라함이 조금이라도 힘이 있을 때 이삭을 낳았다면, 이 기적은 하나님의 은혜 반, 아브라함의 능력 반의 합작품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100세에 낳은 아들은 결코 아브라함의 능력일 수가 없죠.

이것은 100% 하나님의 은혜임을 명백하게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구원과 생명은 우리의 노력으로 만들어내는 결과물이 아니라, 전적으로 위로부터 주어지는 선물인 줄로 믿습니다.

바로 이 지점, 우리의 기대가 바닥을 치고 차가운 냉소만 남은 절망의 끝자락에서 오늘 본문 1절은 이렇게 선포합니다.
1)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사라를 돌보셨고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그대로 사라에게 이뤄 주셔서

이 짧은 한 절에 우리 신앙의 모든 해답이 들어있습니다. 성경은 아브라함이 노력했으므로 라고 하지 않습니다. 사라가 지극정성으로 기도했으므로 라고도 하지 않습니다. 이 모든 기적의 원인은 오직 하나,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입니다. 1절과 2절에 걸쳐 이 표현이 세 번이나 반복됩니다. 인간은 변덕스럽지만, 하나님은 신실하시기에 약속 하신 말씀은 반드시 그대로 이루신다는 선포입니다.

특별히 ‘돌보셨고’라는 원어의 의미를 찾아보면, 이것은 하나님이 자기 백성의 고통 속으로, 삶의 한복판으로 뚫고 들어오시는, 주권적인 개입을 의미합니다. 생명의 주관자이신 하나님이 사라의 죽은 태에 친히 간섭하신 것입니다. .

그러자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2절을 보시죠.
2)사라가 임신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바로 그때 늙은 아브라함과 사라 사이에서 아들이 태어났습니다.

여기서 “약속하신 바로 그때” 라는 구절을 보시죠. 여러분, 우리는 늘 늦었다고 불평하지만, 하나님의 시계는 고장 나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보기엔 지루하고 힘든 시간이었지만, 하나님 편에서는 인간의 힘이 빠지고 오직 하나님의 영광만이 드러날 수 있는 가장 완벽한 때였습니다.

하지만. 이 약속이 성취되기 전, 기다림의 시간 동안, 우리가 저지르기 쉬운 치명적인 실수가 있습니다. 바로 기다림을 견디지 못해 우리 손으로 만들어내는, 나만의 해결책이라는 것이 있죠.

아브라함과 사라는 25년을 온전히 인내하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불안해 했고 흔들렸습니다. 그래서 고안해 낸 것이 사라의 여종 하갈을 통해 낳은 아들, 이스마엘입니다.

이스마엘은,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지 못하고, 내 방식과 내 상식으로 만들어낸 인간적인 해결책입니다. 하나님, 정 안 주시면 제가 알아서 할게요. 이 정도면 합리적이지 않습니까? 이런 것이죠.

당시 관습으로는 여종을 통해 아들을 얻는 것이 흠이 아니었을지 모릅니다. 아브라함은 이스마엘을 보며 그래, 이 아이가 내 상속자다 라면서 위안을 얻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이 나만의 해결책, 이스마엘은 결국 어떻게 됩니까? 당장은 문제를 해결해 주는 것 같고 기쁨이 되는 것 같았지만, 결국에는 가정의 불화와 갈등의 씨앗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인 이삭이 태어났을 때, 이스마엘은 이삭을 조롱하고 괴롭히는 존재가 됩니다. 우리가 인간적인 잔머리로 해결하려 했던 일들은 언젠가 반드시 우리 삶에 가시가 되어 돌아온다는 것이죠.

오늘 여러분의 삶에, 이스마엘 같은 것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말씀과 타협하고, 신앙 양심을 팔고, 스스로를 속여서 억지로 잡은 그 무엇은 이스마엘일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하나님이 주시지 않은 나만의 해결책은 결코 우리에게 참된 만족을 줄 수 없음을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그것은 결국 목마름을 더할 뿐이며, 진짜 약속인 ‘이삭’이 올 때 오히려 걸림돌이 될 뿐입니다. 하나님은 오늘 우리에게 묻고 계십니다. 네가 붙들고 있는 그 이스마엘, 너의 불안을 달래기 위해 만든 너만의 해결책을 내려놓을 수 있겠느냐?

아브라함은 이 실수를 통해 철저히 배웠습니다. 그래서 100세에 얻은 아들 앞에서는 전과 다른 모습을 보입니다. 본문 3절과 4절을 보겠습니다.
3) 아브라함은 자기에게 태어난 아들, 곧 사라가 자기에게 낳아 준 아들을 이삭이라고 이름 지었습니다.
4)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명령하신 대로 아브라함은 자기 아들 이삭이 태어난 지 8일 만에 그에게 할례를 베풀었습니다.

이삭이라는 이름의 뜻은 웃음입니다. 예전에 아브라함 부부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비웃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비웃음을 심판하지 않으시고, 아예 그 아이의 이름을 웃음이라고 짓게 하셨습니다.

너희가 나를 비웃었느냐? 그러나 나는 너희의 그 비웃음마저도 기쁨의 웃음으로 바꾸어 주겠다. 하나님의 유머이자 은혜입니다. 이제 아브라함은 아이를 부를 때마다 웃음아, 웃음아 하며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게 되었습니다.

또한, 아브라함은 주저 없이 8일 만에 할례를 행합니다. 할례는, 내 생명과 번성은 육체적인 힘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언약에서 나온다는 고백입니다. 100세에 얻은 아들이니 얼마나 귀했겠습니까? 갓난아이에게 칼을 대는 것이 인간적인 정으로는 차마 못 할 일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아브라함은 지체하지 않습니다. 그는 이제 이 아이는 내 소유물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임을 알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에는 아브라함과 사라처럼 하나님의 때를 기다려야 했던 또 한 명의 인물이 있습니다. 바로 다윗입니다. 아브라함의 싸움이 시간과의 싸움이었다면, 다윗의 싸움은 현실과의 싸움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늙어가는 자신의 몸을 보며, 시간이 없다고 절망했습니다. 반면에 다윗은 왕으로 기름 부음을 받았지만, 현실은 10년 넘게 도망자 신세였습니다. 왕궁이 아닌 동굴에서 도망자들과 함께 지내야 했습니다. 아브라함에게는 늙음이 그의 앞길을 막았다면, 다윗에게는 사울 왕의 칼날이 그를 막고 있었습니다.

다윗도 하나님의 약속을 비웃고 싶은 마음이 있지 않았을까요? 하나님, 왕으로 세워주신다더니 이게 뭡니까? 라고 따지고 싶었을 겁니다. 자신의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던 아브라함처럼 다윗도 사울 왕을 죽이고 스스로 왕위를 쟁취할 기회도 있었죠.

하지만 다윗은 그 결정적인 순간에 칼을 거둡니다. 그는 알았던 것입니다. 내 손으로 사울을 죽여 얻은 왕좌는, 이스마엘일 뿐, 하나님이 주시는 이삭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다윗이 쫓겨 다니며 광야에서 보낸 시간은 하나님께서 다윗을 버린 시간이 아니라, 그를 진짜 왕으로 빚어가는 훈련의 시간이었습니다. 결국 하나님의 때가 되었을 때, 그는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영광스러운 왕이 되죠. 아브라함이 100세에 이삭을 안았듯이, 다윗은 하나님의 때에 왕관을 쓰게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오늘 우리는 어떤 시간을 지나고 있습니까? 너무 지쳐서, 기대하는 것조차 잊으신채 마음의 문을 닫고 계십니까? 스스로 만든 이스마엘을 붙들고, 이 정도면 됐다 라고 위안 삼고 있지는 않으십니까?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오늘 본문이 우리에게 주는 결론은 명확합니다. 하나님의 침묵은 거절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왜 응답해 주시지 않는 것일까? 가장 위급한 지금 왜 역사해주시지 않으시는가? 내 기도를 듣고 계실까? 우리가 기도하면서 이런 생각들이 든다면, 그 이유는 내가 생각하는 것을 내가 원하는 때에, 내가 원하는 방법으로 구하는 경우일 것입니다.

하나님을 신뢰한다면, 그분의 시간과 그분의 방법까지 믿고 기다려야 하는데, 기도의 중심이 항상 나에게 있다보니까 하나님께서 침묵하신다고 느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역사하지 않으시는 게 아니라 그분의 때가 이르지 않은 것이죠. 여러분을 향한 하나님의 때는 분명히 있음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우리가 생각하기에는 지금 당장 기도하는 문제들이 이루어지는 것이 누가봐도 최선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전능하신 하나님의 손에 맡기시길 바랍니다. 하나님이 내 삶을 다스리시도록, 그리고, 내 바램까지도 다스리시도록 다 내어드리는 우리가 되길 원합니다.

우리가 해야 할 것은 하나님을 신뢰하며 기다리는 것이죠. 좌절하지 마시고, 포기하지 마시고, 내 방법으로 하나님보다 앞서가지도 마시고, 겸손하게 하나님을 따르는 삶. 그것이 아브라함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에게 주시는 교훈의 한가지 일것입니다.

여러분도 본문 6절의 사라처럼 고백하는 순간이 올 것입니다.
6절 함께 읽고 마치겠습니다.
6) 사라가 말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로 웃게 하시니 이 소식을 듣는 사람이 다 나와 함께 웃을 것이다.”
이 웃음의 주인공이 바로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마무리 기도>
사랑과 은혜가 풍성하신 아버지 하나님.
오늘 말씀을 통해, 나의 끝이 하나님의 시작임을 깨닫습니다. 아브라함의 늙은 몸과 다윗의 어두운 동굴 속에서도 신실하게 일하셨던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주님, 우리는 기다림이 싫어서 내 손으로 이스마엘을 만들려고 했습니다. 내 불안을 달래기 위해 잡았던 많은 것들을 이 시간 주님 앞에 내려놓습니다. 우리의 불신앙과 냉소를 거두어 가 주시고, 오직 말씀하신 대로 이루시는 주님만 바라보게 하여 주시옵소서.

지금 인생의 광야를 지나고 있는 성도들을 기억하여 주시옵소서. 이 기다림의 끝에 하나님이 예비하신 이삭이 있음을 믿고, 오늘을 견딜 새 힘을 주시옵소서. 우리의 비웃음이 변하여 찬송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감사하며 기도드립니다. 아멘.

찬양 : 438장 / 내 영혼이 은총 입어

폐회 : 주기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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