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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년 12월 10일 수요예배 | 운영자 | 2025-12-10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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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2-10 수요 예배 예배로의 부름 : 히브리서 4:16 16) 그러므로 자비하심을 얻고 필요할 때 도우시는 은혜를 얻기 위해 은혜의 보좌 앞으로 담대히 나아갑시다. 예배 기원 자비로우신 하나님 아버지. 지난 3일간의 삶 속에서도 저희를 지켜주시고, 오늘 이 저녁, 예배의 자리로 불러주시니 감사드립니다. 세상에서 지치고 상한 심령들이 이 자리에 모였습니다. 저희를 긍휼히 여겨 주시고, 각 사람의 형편과 처지를 아시는 주님께서 꼭 필요한 은혜로 채워 주시옵소서. 이 예배가 하나님과 깊이 교제하는 시간이 되게 하여 주시며, 남은 한 주간도 넉넉히 이길 힘을 얻는 축복의 시간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감사하며 기도드립니다. 아멘. 신앙고백 : 사도신경 찬양 : 88장 / 내 진정 사모하는 기도인도 : 김주환 집사 성경 봉독 : 창세기 18장 1-8절 설교 : 찾아오신 은혜 말씀을 위해 함께 기도드리겠습니다. 사랑과 은혜가 풍성하신 아버지 하나님. 우리의 삶은 질문투성이지만 해답은 오직 주께 있음을 믿습니다. 선포되는 말씀이 허공에 흩어지는 소리가 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갈라진 마음을 메우고 삶의 문제를 관통하는 하나님의 능력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우리의 상황을 누구보다 잘 아시는 주님께서, 말씀으로 찾아와 주시옵소서. 온전히 인도하여 주실 줄 믿사오며 예수님의 이름으로 감사하며 기도드립니다. 아멘. 할렐루야! 오늘도 주님의 은혜를 사모하여 수요예배의 자리로 나오신 여러분 한 분 한 분을 주님의 이름으로 환영하고 축복합니다. 한 주간의 절반을 지나왔습니다. 세상에서의 바쁜 삶을 잠시 내려놓고, 영혼의 쉼과 재충전을 위해 주님 앞에 나오신 여러분의 발걸음이 얼마나 귀한지 모릅니다. 세상은 여전히 분주하게 돌아가고, 우리의 일상은 고단함의 연속이지만, 예배를 통해 부어주시는 하늘의 위로와 평강이 여러분의 심령을 가득 채우시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우리는 지난 시간, 창세기 17장을 통해 하나님께서 아브람의 이름을 아브라함으로 바꾸어 주신 놀라운 사건을 함께 묵상했습니다. ‘존귀한 아버지’라는 뜻의 이름 아브람이, 열국의 아버지, 즉 많은 민족의 아버지라는 뜻의 아브라함으로 변화된 것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호칭이 바뀐 것이 아닙니다. 그의 존재 목적과 인생의 방향이 완전히 새롭게 설정되었음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복을 약속하셨고, 그 약속은 이제 아브라함의 인생을 이끌어가는 거대한 이정표이자 흔들리지 않는 닻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며, 또 창세기를 읽으면서 가장 많이 접하고, 또 가장 좋아하는 단어 중 하나가 바로 ‘복’입니다. 우리는 새해가 되면,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라고 인사하고, 기도할 때도, 하나님, 복 주시옵소서 라고 간구합니다. 그런데 성도님들, 우리가 이 ‘복’을 생각할 때 종종 오해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우리는 은연중에 아브라함이 받은 복을 세상적인 성공이나 물질적인 풍요, 자녀가 잘되는 것, 혹은 내가 무병장수하는 것 정도로 국한해서 생각하곤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종종 이렇게 기도합니다. 하나님, 저도 아브라함처럼 복 받게 해주세요. 부자가 되게 해주시고, 남부럽지 않게 살게 해주세요. 라고 기도하기도 하는데요. 기도의 적용점이 오로지 나의 행복과 나의 안위에만 맞춰져 있는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은 우리의 필요를 채우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시고, 오늘 우리에게 주고자 하시는 복은 단순히 개인의 행복을 넘어선 훨씬 더 크고 위대하며 영원한 가치를 지닌 개념입니다. 창세기 12장 2절과 3절의 말씀을 다시 한번 떠올려 보실까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실 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2)내가 너를 큰 민족으로 만들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크게 할 것이니 네가 복의 근원이 될 것이다. 3)너를 축복하는 사람에게는 내가 복을 주고 너를 저주하는 사람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인해 복을 받을 것이다. 이 말씀의 핵심이 무엇입니까? 아브라함은 복의 종착점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그는 복을 담아두는 저수지가 아니라 복이 흘러가는 통로로 부름받았습니다.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인해 복을 받을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큰 그림입니다. 만약 우리가 생각하는 ‘복’이 단순히 돈이나 물질을 의미한다면, 이 말씀은 세상의 모든 ‘부’가 아브라함을 통해서만 흘러나온다는 뜻이 되는데, 과연 그렇습니까? 역사적으로 보아도, 성경을 보아도 그렇지 않습니다. 아브라함은 부자였지만, 당대의 모든 왕보다 부자는 아니었습니다. 오늘날을 보시면, 중동의 석유 재벌 만수르나, 테슬라의 일론 머스크 같은 엄청난 거부들이 모두 아브라함의 믿음을 가진 사람들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세상의 재물은 믿음이 없어도, 하나님을 몰라도 얼마든지 얻을 수 있는 일반적인 은총의 영역에 속하기도 합니다. 그럼, 물질적인 것이 아니라면 ‘복’이 의미하는 것이 심리적인 행복이나 마음의 평안일가요? 물론 예수님 믿는 우리에게 참된 평안이 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을 모르는 사람들, 예수님을 모르는 사람들도 나름대로 인생의 즐거움을 누리고 기뻐하며 살아갑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인해 받게 될 복은, 세상 어디에나 있는 그런 보편적인 행복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이 말하는 진짜 복,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그 본질적인 복은, 갈라디아서 3장 8절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8)성경은 하나님께서 믿음으로 인해 이방 사람을 의롭다고 인정하실 것을 미리 알고 먼저 아브라함에게 복음을 선포했습니다. “모든 이방 사람이 네 안에서 복을 받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단순히 잘 먹고 잘사는 법을 가르쳐 주신 것이 아니라, ‘복음’을 전하셨다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일반적인 복이 아니라 이방인이 아브라함을 통해 ‘믿음으로 의로워지는 역사’가 일어나는 것, 이것이 바로 아브라함이 받았던 복의 실체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아브라함의 복은 다름 아닌 죄인이 믿음으로 의로워지는 것, 바로 구원입니다. 땅의 모든 족속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죄 씻음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얻게 되는 것,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가장 크고 유일한 복입니다. 돈이나 건강, 명예나 권력은 아브라함이 없어도, 예수님을 몰라도 세상 사람들이 노력하면 얻을 수 있는 것들입니다. 그러나 구원이라는 복, 영원한 생명이라는 복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게만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이 자리에 나와 예배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돈을 더 많이 벌기 위해서입니까? 아닙니다. 우리가 바로 그 아브라함의 영적 후손으로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얻은, 이 놀라운 구원의 복을 받은 주인공들이기 때문인 줄로 믿습니다. 이 구원의 감격이 오늘 우리의 예배 가운데 다시 한번 회복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 구원의 복, 은혜의 복을 마음에 품고, 이제 오늘 본문인 창세기 18장의 현장으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1절 말씀입니다. 1)여호와께서 마므레의 큰 나무들 근처에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셨습니다. 그때 아브라함은 한낮의 열기 속에서 장막 입구에 앉아 있었습니다. 오늘 말씀의 배경을 보시면, 한낮의 열기 속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시간적으로는 태양이 가장 뜨겁게 내리쬐는 정오입니다. 중동의 정오는 모든 활동이 멈추는 시간입니다. 그 뜨거운 열기 속에, 99세의 노인 아브라함이 장막 문에 힘없이 앉아 있습니다. 왜 앉아 있을까요? 그는 불과 얼마 전 99세라는 고령의 나이에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할례를 받았습니다. 젊은 사람도 감당하기 힘든 수술을, 100세를 바라보는 노인이 감당했습니다. 육체적으로 회복이 덜 된 상태입니다. 상처는 욱신거리고 몸은 천근만근 무거웠을 것입니다. 고통스럽고 지치고 무기력한 상태입니다. 아무 일도 일어날 것 같지 않은 평범하고 나른한 오후, 적막만이 흐르는 그 시간, 아브라함은 장막 문에 기대어 멍하니 밖을 바라보고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내 몸은 이렇게 아픈데, 하나님의 약속은 언제 이루어질까... 하며 육체의 고통과 무료함을 견디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때, 2절입니다. 2)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보니 세 사람이 맞은편에 서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은 그들을 보자마자 맞이하러 얼른 장막에서 뛰어나갔습니다. 그리고 땅에 엎드려 절했습니다. 아브라함은 지금 환자입니다. 거동이 불편한 99세의 노인입니다. 그런데 낯선 세 사람이 서 있는 것을 보자마자 ‘얼른 장막에서 뛰어나갔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그리고 땅에 엎드려 절했다고 합니다. 상식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 행동입니다. 그냥 앉아서, 거기 누구시오? 라고 묻거나 또는 하인들을 시켜서 나가보라고 해도 충분할 텐데 그는 아픈 몸을 이끌고 달려나갔습니다. 이 대목에서 많은 신학자들과 성경 독자들은 궁금해합니다. 아브라함은 이때 자신에게 나타난 분이 하나님이심을 알았을까, 몰랐을까?에 대한 의문인데요. 이에 대해 여러 가지 해석이 있습니다. 히브리서 13장 2절에 보면 2)나그네 대접하기를 소홀히 하지 마십시오. 어떤 사람들은 나그네를 대접하다가 자기도 모르게 천사들을 대접했습니다 자기도 모르게 라는 표현을 근거로, 아브라함이 처음에는 그들이 하나님과 천사들인 줄 몰랐을 것이라고 보는 견해가 있습니다. 반면에 창세기 18장 3절에서 아브라함이, 내 주여 라고 부른 것을 볼 때 처음부터 알아본 것이 아니냐는 의견도 있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주’라는 호칭은 오늘날 우리가 선생님이라고 부르는 것처럼 당시 사회에서 존경의 의미를 담아 상대를 높여 부르는 일반적인 표현일 수도 있습니다. 또 어떤 분들은 고대 근동의 문화를 들어 설명합니다. 당시 광야에서 나그네를 대접하는 것은 생존과 직결된 문제였기에, 이방인을 극진히 대접하는 것을 신성한 의무이자 가문의 영예로 여겼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 역시 그 문화 속에서 훌륭한 인격을 가진 사람이었기에, 알지 못하는 나그네라 할지라도 최선을 다해 섬겼다는 것이죠. 저는 이 장면을 묵상하면서 예전에 아주 인상 깊게 보았던 영화 ‘론 서바이버(Lone Survivor)’가 떠올랐습니다. 이 영화는 실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졌습니다. 미군 특수부대원들이 탈레반 지도자를 체포하기 위해 작전에 투입되는데, 자신들을 발견한, 양치기 소년을 살려주게 되었고, 그로인해 적에게 발각되어 치열한 교전을 벌이게 됩니다. 수적 열세 속에서 처절한 전투 끝에 4명의 대원 중 3명이 전사하고, 오직 ‘마커스’라는 한 대원만이 심각한 부상을 입은 채 간신히 목숨을 건져 도망칩니다. 그는 탈진 상태로 산속을 헤매다 아프가니스탄의 한 민간인을 만나게 됩니다. ‘굴라브’라는 이름의 마을 주민이었습니다. 굴라브의 입장에서 이 미군을 돕는 것은 목숨을 건 도박입니다. 만약 탈레반이 알게 되면 자신뿐만 아니라 가족과 마을 전체가 몰살당할 수 있는 위험천만한 일입니다. 실제로 영화에서 탈레반은 그를 내놓으라고 협박하고 마을을 공격합니다. 하지만 굴라브는 그 부상당한 이방인, 미군을 외면하지 않습니다. 그를 집으로 데려가 상처를 치료해주고, 먹을 것을 주며, 목숨을 걸고 그를 보호합니다. 도대체 무엇이 그토록 위험한 선택을 하게 했을까요? 그들에게는 ‘파슈툰왈리’라는 수천 년을 내려온 불문율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도움을 요청하며 찾아온 손님은, 그가 적이라 할지라도 목숨을 걸고 보호하고 대접한다. 이것이 그들의 전통이자 자존심이었습니다. 자신을 찾아온 나그네를 보호하는 것이 그들에게는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명예였던 것입니다. 아마도 아브라함이 살았던 시대의 문화도 이와 비슷하지 않았을까 생각해 봅니다. 뜨거운 태양 아래 지쳐 있는 나그네를 그냥 지나치게 하는 것은 그들을 죽음으로 내몰 수도 있는 일이었기에, 아브라함은 비록 자신의 몸이 아프고 힘들지라도 벌떡 일어나 그들을 맞이했던 것입니다. 이것은 아브라함의 훌륭한 인품과 섬김의 자세를 보여주는 대목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성도님들. 아브라함이 손님을 하나님으로 알고 대접했는지, 모르고 대접했는지, 혹은 그의 인격이 얼마나 훌륭했는지보다 훨씬 더 중요한 사실이 오늘 본문에 있습니다. 다시 한번 1절 말씀을 주목해 주시죠. 1)여호와께서 마므레의 큰 나무들 근처에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셨습니다. 이것이 핵심입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찾아낸 것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이 기도를 열심히 해서 하나님을 불러내린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먼저 아브라함을 찾아오셨습니다. 우리의 신앙은 여기서부터 시작됩니다. 종교는 인간이 신을 찾아가는 과정이라고 말합니다. 고행을 하고, 도를 닦고, 정성을 바쳐서 신의 마음에 들려고 노력합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다릅니다. 기독교는 하나님께서 인간을 찾아오시는 계시의 종교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찾아야 한다면, 보이지도 않고 만져지지도 않는 그 거룩하신 분을 어디서 만날 수 있겠습니까? 죄인 된 우리의 힘으로는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가 연약할 때, 우리가 지쳐 있을 때, 우리가 죄악 가운데 헤매고 있을 때, 우리의 일상 한복판으로 먼저 들어오시는 분이십니다. 오늘 본문의 시간적 배경은 정오입니다. 가장 뜨겁고, 가장 지치고, 아무도 움직이지 않는 그 시간입니다. 어쩌면 우리 인생의 ‘정오’와 같은 순간일지도 모릅니다. 너무 분주해서 정신이 없거나, 혹은 삶의 무게에 지쳐서 만사가 귀찮고 무기력해진 그런 순간 같은 것이죠. 아브라함은 99세였습니다. 육체의 소망이 끊어진 나이입니다. 게다가 수술 후의 통증으로 신음하고 있었습니다. 바로 그, 가장 낮고 연약한 자리에 하나님께서 찾아오신 것입니다. 이것이 은혜죠. 내가 준비되었을 때, 내가 깨끗할 때, 내가 뭔가 그럴듯한 업적을 이루었을 때 찾아오시는 것이 아니라, 가장 비참하고 연약한 모습으로 앉아 있는 그 자리에 주님이 찾아오시는 것, 이것이 바로 은혜인줄로 믿습니다. 아브라함을 찾아오신 하나님께서는 그곳에서 아브라함이 차려온 음식을 드시며 그와 대화를 나누십니다. 앞선 17장에서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으셨습니다. 할례를 명하셨고, 이삭의 출생을 예고하셨습니다. 그리고 18장에 이르러, 하나님은 인간의 몸을 입은 듯한 모습으로 나타나셔서 아브라함과 식탁의 교제를 나누십니다. 성경에서 함께 먹는다는 것은 단순한 식사가 아닙니다. 그것은 깊은 친밀함의 표현이며, 언약 관계의 확인입니다. 오늘 본문에 기록된 이 식탁의 교제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을 확증하시고, 그와 더 깊은 관계로 들어가기를 원하신다는 하나님의 사랑의 초청입니다. 어떤 신학자들은 이것을 성경에 나타난 최초의 성찬식과 같은 의미가 있다고 해석하기도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오늘 말씀을 맺으며, 요한계시록 3장 20절 말씀을 여러분과 함께 기억하기 원합니다. 20)보라. 내가 문 앞에 서서 두드리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들어가서 그와 함께 먹고 그는 나와 함께 먹을 것이다. 이 말씀은 라오디게아 교회 성도들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그들은 부자였지만 영적으로는 가난했습니다. 그들의 신앙은 차지도 않고 뜨겁지도 않고 미지근했습니다. 열정을 잃어버렸습니다. 주님 없이도 살 수 있다고 착각했습니다. 그런 그들에게 주님은 문 밖에 서서, 간절하게 문을 두드리고 계십니다. 내가 너와 함께 먹고 싶다. 내가 너와 교제하고 싶다. 혹시 여러분 중에 주님을 향한 처음 사랑이 식어버린 분이 계십니까? 반복되는 일상에 지쳐서, 예배가 습관이 되고 기도가 노동처럼 느껴지지는 않으십니까? 사는 게 너무 힘들어서 주님 생각할 겨를이 없습니다 라고 말씀하고 싶으신 분이 계신가요? 오히려 그럴 때 일수록 기억하셔야 합니다. 주님은 지금도 우리 곁에 계십니다. 가장 뜨겁고 지루한 여러분의 일상, 그 정오의 시간 속에 아픈 상처를 안고 앉아 있는 그 장막 문 앞에 주님은 서 계십니다. 때로는 도움이 필요한 이웃의 모습으로, 때로는 감당하기 힘든 고난의 모습으로, 때로는 설명할 수 없는 마음의 감동으로 주님은 우리 문을 두드리십니다. 이제 우리가 할 일은 단 하나입니다. 아브라함처럼 ‘반응’하는 것입니다. 비록 몸이 아프고, 상황이 힘들고, 마음이 무거울지라도, 주님이 찾아오셨을 때 무기력한 자리에서 일어나야 합니다. 주님을 향해 달려나가야 합니다. 여러분의 닫힌 마음의 문을 여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고백하십시오. 주님, 제가 여기 있습니다. 내 삶에 들어오셔서 나의 주인이 되어 주시옵소서. 내 메마른 심령에 생수의 강이 흐르게 하여 주시옵소서. 하나님은 우리의 대단한 능력을 원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은 지친 몸을 이끌고라도 주님을 반기며 달려나가는 그 중심, 그 태도를 보십니다. 오늘 이 수요예배가, 우리를 먼저 찾아오신 주님의 그 놀라운 사랑을 다시 한번 깨닫는 귀한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식어진 가슴에 다시 성령의 불이 되살아 나길 소망합니다. 예전의 뜨거웠던 기도의 열정, 말씀에 대한 순수한 사모함을 회복하여, 날마다 주님과 더불어 먹고 마시는 깊고 친밀한 교제의 삶을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마무리 기도> 사랑과 은혜가 풍성하신 아버지 하나님. 오늘 말씀을 통해, 자격 없는 우리에게 먼저 찾아와 주시는 하나님의 한없는 사랑을 깨닫게 하시니 감사드립니다. 아브라함처럼 연약하고 지친 모습으로 앉아 있던 저희들입니다. 삶의 무게에 눌려, 죄의 짐에 눌려 주님이 곁에 와 계신 줄도 모르고 살았던 어리석은 저희들을 긍휼히 여겨 주시옵소서. 때로는 삶이 너무 고단하여 마음의 문을 걸어 잠그고, 주님께서 두드리시는 소리를 외면했음을 고백합니다. 타성에 젖은 신앙, 형식적인 예배를 벗어버리고, 이제는 기쁨으로 주님을 맞이하기를 원합니다. 믿음의 눈을 들어 주님을 바라보게 하여 주시옵소서. 내 삶의 이해되지 않는 상황과 힘겨운 조건들 속에서도, 신실하신 주님이 나를 사랑하심을 의심치 않게 하여 주시옵소서. 매일 말씀의 거울 앞에 내 삶을 비추어 보며, 주님과 동행하는 기쁨을 누리게 하여 주시옵소서. 우리를 통해 세상으로 복이 흘러가게 하여 주시고, 잃어버린 영혼들이 주님께로 돌아오는 구원의 통로로 우리를 사용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감사하며 기도드립니다. 아멘. 찬양 : 384장 / 나의 갈 길 다가도록 폐회 : 주기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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