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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년 4월 9일 수요예배 | 운영자 | 2025-04-17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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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4.9.(수) 세상은 요란하고 갈팡질팡 차가운 돌풍과도 같지만 여전히 우리를 보호하시고 지키시는 주님이 계시기에 다시 힘을 내고 나아갈 수 있음이 감사합니다. 하임의 가족 모두모두 평안들 하신지요? 안부드리며 수요 예배순서 올립니다. * 묵상: 너희를 위로하는 자는 나 곧 나이니라 너는 어떠한 자이기에 죽을 사람을 두려워하며 풀 같이 될 사람의 아들을 두려워하느냐 하늘을 펴고 땅의 기초를 정하고 너를 지은 자 여호와를 어찌하여 잊어버렸느냐 너를 멸하려고 준비하는 저 학대자의 분노가 어디 있느냐 결박된 포로가 속히 놓일 것이니 죽지도 아니할 것이요 구덩이로 내려가지도 아니할 것이며 그의 양식이 부족하지도 아니하리라(사51:12~14) * 기원: 여호와를 잊어버리고 풀 같이 될 사람을 두려워하며 사는 인생을 사랑하시는 우리 주 여호와 하나님을 경배하고 파숫꾼의 경성함 같이 주의 백성을 지키시는 하나님을 우리의 감정과 지성과 의지를 다하여 사랑합니다. 이 밤도 불러주신 은혜를 따라 우리의 예배를 받아주시고 홀로 영광 받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 신앙고백: (사도신경) * 찬송: 456장 (거친 세상에서 실패하거든 ) * 기도: 이수임권사 * 성경: 요21:15~19 ( 실패한 곳에서 부르시는 주님 ) 잠시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이제 말씀을 듣기 원합니다. 전하는 자와 듣는 자가 진리의 성령님의 도우심을 받아 우리의 영이 충만하기 원합니다. 우리를 붙드시고 우리를 진리로 가르쳐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우리는 누구나 실수하고 때로는 넘어지기도 합니다. 특히 믿음의 길에서 실패했을 때 나는 자격이 없다. 하나님도 나를 포기하신 것 아닐까? 이런 마음에 사로잡혀 스스로 신앙의 길에서 멀어지는 때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베드로가 그렇습니다. 그는 마26:33절에서,막14:29절에서도 예수님을 향해 모두가 다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절대 주님을 부인하지 않겠습니다. 라고 장담했지만 가장 결정적인 순간에 세 번이나 예수님을 부인했습니다. 그 후 그는 예수님을 만나기 전 본업이었던 고기잡이로 돌아갑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예수님은 그를 찾아오시고 다시 부르십니다. 이 장면은 우리 모두에게 위로와 도전이 됩니다. 실패한 제자도 다시 부르시는 주님의 은혜 앞에서 새로운 사명을 받을 수 있다는 것 사순절을 보내고 있는 오늘 우리도 다시 주님 앞에 서야 할 때입니다. 다시 고기잡이로 돌아간 베드로를 찾아오신 예수님은 ‘왜 그랬느냐’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 비난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물으십니다. 이 물으심에 대한 관주를 보면 예수님께서 베드로가 부인하게 될 것을 예언하실 때 베드로가 했던 말을 상기시켜주고 있는 물으심입니다. 이 말씀의 난하 주를 보면 네가 나를 인하여 실족하리라(예수님 때문에 넘어질 것이다) 하셨을 때 베드로는 예수님 때문에 넘어질지라도 실족하지 않겠나이다 라고 대답하고 있습니다. 이러했던 베드로를 향해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라고 물으셨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님을 향한 사랑이 회복되어야 사명도 회복되기 때문입니다. 신앙의 핵심은 열심이나 성과가 아니라 주님을 향한 사랑입니다. 오늘 주님도 우리에게 묻고 계십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이 물으심은 제가 신학교를 입학했을 때 저에게 하셨던 질문이기도 합니다. 그때서야 같은 질문을 하시는 주님 앞에서 그렇다고 대답했던 베드로의 심정을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안사랑해서 부인하게 되었던 것이 아닙니다. 사랑했음에도 연약하여 넘어지고 실수를 했던 것입니다. 저 또한 주님의 물으심에 부족하고 연약하여 넘어질지라도 주님을 사랑할 수 밖에 없음을 고백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주님의 물으심에 베드로의 고백은 예전처럼 큰 소리로 장담하지 않습니다. 이제 그는 자신의 연약함과 실패를 알기에 조심스럽게 ‘주님 주님께서 제 마음 아시잖아요? 저는 주님을 사랑합니다. 세 번의 질문과 세 번의 대답은 감정과 지성과 의지로 사랑하느냐 라는 질문이고 감정뿐 아니라 지성과 의지적으로 주님을 사랑한다는 대답입니다. 예수님의 세 번의 질문은 우리의 본성이 세 단계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입니다.감정은 세 단계의 본성 중에서 가장 피상적인 겉 껍질의 것입니다. 지성: 처음 우리의 믿음의 시작은 아마 흥분과 환희 속에서 이루어졌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흥분과 환희는 이제 과거의 일입니다. 우리는 매일 매일 더 큰 확신 속에서 우리가 그리스도를 선택한 것이 현명한 선택이었다고 자신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의지: 의지는 우리의 본성 중 제일 깊은 곳의 단계입니다. 거기에서는 결단과 행동이 나오고 특별히 의지 위에서 한 가지 일을 꾸준히 계속하려는 바람과 희망이 나옵니다. 어떤 한 대상에 대한 자신의 사랑이 얼마나 강한지 여부는 그 대상으로부터 즐겁고 행복한 감정만을 느끼는 초기 단계를 지나고 그 대상으로부터 갖은 유익을 이끌어 내는 단계를 지나 모든 것을 다 내어주고 짐을 같이 짊어지고 살아야 하는 대상을 위해 자기 희생을 실천할 수 있는 단계에 이르러서야만 비로소 알 수 있다고 합니다. 감정적으로 지성으로 의지로 사랑한다는 이 고백은 완벽한 믿음이 아니라 진실한 사랑의 표현입니다. 베드로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후 사랑을 고백하고 예수님께 사명을 다시 부여받았습니다. 그리고 그는 초대교회에서 중심된 역할을 했습니다. 예수님을 은 삼십에 팔아먹고 죽은 가룟유다 대신 맛디아를 사도로 뽑는 일을 주관하였고, 성령을 속인 아나니아 부부를 처벌하였고, 성전 앞에 앉은 앉은뱅이를 고쳐주는 기적을 행하고, 중풍병자를 고쳐주기도 했고, 하나님의 능력으로 죽은 다비다를 살려 욥바 사람들이 주를 믿게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복음을 전하다가 옥에 갇히고, 사마리아 사람들이 성령을 받게 했고, 고넬료의 집에 복음을 전하게 됩니다. 이방인들에게도 성령이 임하심을 보고 예루살렘 총회에 알리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방인과 함게 식사를 하다가 유대인을 두려워하여 물러난 일로 바울에게 책망을 받기도 합니다. 베드로는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한 사람이었지만 성령의 능력으로 힘있게 복음을 전하였고 베드로전서와 베드로후서를 기록했습니다. 주님은 우리가 완전해서 쓰시는 것이 아닙니다. 진심으로 사랑하고자 하는 마음을 보시고 그 사랑 위에 사명을 맡기십니다. 오늘 우리도 주님 앞에 ’주님 저는 부족하지만 주님을 사랑합니다‘라고 고백할 수 있다면 그것이 바로 사명의 시작입니다. 사명은 회복의 증거입니다. “내 어린 양을 먹이라....고전3:2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너희를 젖으로 먹이고 밥으로 아니하였노니 이는 너희가 감당하지 못하였음이거니와 지금도 못하리라 영적으로 미성숙한 자들을 신령하고 순전한 젖인 복음으로 양육하라는 의미입니다. 내 양을 치라...그릇된 길로 가기 쉬운 영혼들을 잘 감독하라는 의미입니다. 사53:6절의 말씀처럼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가기가 쉽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고난을 당하실 이유를 진술하고 있는 말씀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이 죄인임을 알기 전에는 그리스도의 대속의 고난을 깨닫지 못합니다. 내 양을 먹이라” 어린 양 뿐 아니라 장성한 양 즉 비교적 성숙한 그리스도인도 끊임없이 양육되어야 함을 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양들이 성장을 거듭하여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데까지 이를 것을 소원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단지 사역적 명령이 아닙니다. ’나는 너를 여전히 믿고, 맡기며, 함께 하기를 원한다‘는 주님의 신뢰의 표현입니다. 너는 여전히 내 사람이다 나는 너를 포기하지 않았다 실패했던 자에게 다시 기회를 주시는 주님 포기하지 않으시고 다시 사명을 맡기시는 주님의 은혜는 우리를 다시 일어서게 만듭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진실로 진실로 내가 네게 이르노니.....너는 나를 따르라” 이 말씀은 단순한 따름이 아니라 베드로가 앞으로 어떤 길을 걷게 될지 심지어 어떤 죽음을 맞게 될지 알고 계시면서 그럼에도 따르라고 말씀하십니다. 목양을 위임받은 베드로에게 비장한 예언이 선고되었습니다. 그것은 순교였습니다. 선한 목자이신 예수님께서 양들을 위해 목숨을 버리셨다면 그 양떼를 위탁받은 베드로 역시 자신의 생명을 바쳐야 했습니다. 네가 젊어서는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지만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하지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21:18) 이 말씀을 하신 것은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을 가리키는 말씀입니다. 여기에 순교의 정신이 제시됩니다. 순교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성도의 죽음을 의미합니다. 신실하지 못한 자들은 박해시에 순교할 엄두도 못내지만 투철한 신앙인들은 언제라도 주를 위해 피흘릴 각오가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적그리스도가 가하는 외적 박해 못지않게 자신들 속에서 성령을 거스르는 육체의 소욕에도 촉각을 곤두세우고 내부의 적이 더 어려운 상대임을 인식하고 처절한 영적 전쟁을 벌이며 자아속에 깊이 도사리고 있는 땅의 지체를 죽여야만 합니다. 이 싸움은 필연적으로 자신의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박는 고통을 수반합니다. 바로 이것이 삶 가운데의 순교입니다. 제가 중국에 있을 때 현지교회 집사님은 예수님은 자기를 위해 십자가의 고통을 당하셨는데 내가 맹장수술 하나 하는걸 못참아 마취를 해야 하겠느냐며 생으로 수술을 받으면서 십자가의 고통을 생각했다는 얘기를 들은적이 있는데 참으로 신선한 충격이었습니다. 우리는 순교의 어원을 깊이 생각하여 살펴보고 교훈을 얻을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던 증인들이 복음 전파와 신앙 파수를 위해 죽음마저 감수했기 때문에 순교 또는 순교자란 말이 생겨났습니다. 따라서 성도들은 롬14:7,8절 말씀처럼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해 죽을 수 있는 순교자의 정신을 굳게 지니고 지켜야 하겠습니다. 주님과의 동거는 마땅히 그렇게 되어야 한다는 의무이기 전에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지금도 전과 같이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을 통해서 그리스도가 위대하게 되는 것입니다.(빌1:20) 외경 베드로 행전에 보면 네로 황제의 박해시 피난하던 베드로가 로마로 향하시는 예수님을 만납니다. 베드로가 묻습니다.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그 때 베드로는 로마에서 십자가에 달리시겠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회개한 후 로마로 가서 거꾸로 십자가에 달려 순교했다는 것을 교부들이 확인한 바 있다고 합니다. 이 내용이 쿼바디스라는 영화로 만들어지기도 했습니다. 신앙은 은혜로 시작되지만 헌신과 순종으로 완성됩니다. 실패한 베드로가 그 길을 걸었듯이 오늘 우리도 다시 주님을 따르는 삶을 결단해야 할 때입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자는 누구일까요? 그는 주님의 사랑을 받은 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사상을 믿고, 예수님의 속죄를 믿고, 예수님의 살아계신 인격을 믿고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결론: 주님께서 사랑하시는 여러분! 우리 모두는 크고 작은 실패를 경험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 실패의 자리에서 우리를 다시 부르십니다.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내양을 먹이라 너는 나를 따르라 오늘도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나는 너를 포기하지 않았다. 다시 사랑을 고백하고 다시 일어서라 내가 너와 함께하겠다. 이 부르심 앞에 다시 순종으로 반응하는 우리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주님 실패한 베드로를 다시 부르신 것처럼 저희를 향한 주님의 사랑이 오늘도 변함없으심을 믿습니다. 부족하고 실수가 많지만 주님을 사랑합니다. 다시 주님을 따르게 하시고 주님께서 맡기신 일들을 위하여 순종과 헌신의 길을 걸어가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 찬송: 463장 (신자 되기 원합니다) *주기도: 로 예배를 마치겠습니다. 샬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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