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2025년 4월 2일 수요예배 | 운영자 | 2025-04-04 | |||
|
|||||
|
2025.4.2.(수) 기다리던 봄이 오는가 했더니 따뜻한 봄이 오기가 이렇게도 어려운가 봅니다. 뚝 떨어져버린 낮은 기온을 견디는 것이 한겨울 추위를 견디는 것보다 더 으슬으슬한 추위를 느낍니다. 하임의 가족들 모두 평안들 하신지요? 수요 예배순서 올립니다. * 묵상: 마지막 날에 여호와의 성전이 있는 산이 산들의 머리 위에 우뚝 서고 언덕들보다 높이 솟아 모든 민족들이 그리로 물밀듯이 몰려올 것이다. 많은 백성들이 오면서 “자 올라가자 여호와의 산으로! 야곱의 하나님의 집으로! 그분이 우리에게 그분의 길을 가르쳐 주실 것이니 우리가 그분의 길을 걸어가자!” 율법이 시온에서 나오고 여호와의 말씀이 예루살렘에서 나온다. 아멘 * 기원: 참으로 어두운 세상을 살아 가는 우리에게 길을 가르쳐 주시는 하나님을 경배합니다. 때를 따라 만물을 새롭게 하시는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오늘도 무감각하고 무정한 우리를 참아주시는 하나님 사랑합니다. 이 저녁도 우리가 그 사랑의 날개 아래 깃들기 원하오니 우리를 받아 주옵시고 우리의 예배를 받아 주옵소서 또한 우리의 예배를 주관하여 주시고 주님 홀로 영광 받으시옵소서 우리의 예배가 하나님 아버지께 참된 기쁨이 되기를 소망하며 예수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 찬송: 261장 (이 세상의 모든 죄를) * 기도: 이세훈 장로 * 성경: 창4:25~26 ( 에노스 ) 오늘은 제가 읽으면서 참으로 은혜를 많이 받은 목사님의 책을 중심으로 본문 말씀을 통해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창세기 1장의 내용은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하나님의 천지창조입니다. 2장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신 구체적인 설명과 사람을 위한 에덴동산의 창설을 밝혀주고 있습니다. 3장은 인간의 범죄장입니다. 선악과를 먹지 말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인간은 귀로만 들었을 뿐 마음으로 받은 삶을 살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는 실낙원 에덴동산의 상실이었습니다. 4장에는 낙원을 잃은 인간의 삶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인간들은 스스로 하나님께 속한 자라 여기며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기도 했지만 하나님께 속한 자답게 하나님의 말씀을 좇아 살지는 않았습니다. 동생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쳐서 죽여버리고 동생을 찾으시는 하나님을 향해 자신은 모르는 일이라고 시치미를 떼기도 합니다. 하나님께 속했다는 자의식은 가지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인간이 하나님의 말씀을 좇아 살기 위해 자신의 인격을 다해 스스로 하나님을 찾은적은 없었습니다. 그러던 인간이 갑자기 온 마음을 다해 자발적으로 하나님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오늘 본문 창세기 4:25~26절은 그 까닭을 밝히고 있습니다. “아담이 다시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아들을 낳아 그 이름을 셋이라 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내게 가인의 죽인 아벨 대신에 다른 씨를 주셨다 함이며 셋도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에노스’라 하였으며 그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가인이 죽인 아벨 대신에 태어난 셋이 장성한 뒤 아들을 낳아 ‘에노스’라는 이름을 지어 주었습니다. 그리고 그 때부터 인간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자발적으로 부르기 시작했다고 했습니다. 왜 그때부터였을까요? 자식의 이름은 그 이름을 지어주는 부모의 신앙고백인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에노스는 사람의 이름이지만 히브리어 보통명사이기도 한데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 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죄를 범한 인간에게 하나님께서는 그 대가로 창3:17,19절에서 분명 사망을 예고 하셨습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는 날에는 네가 반드시 죽을 것이다”, “네가 흙에서 취해졌으니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네 얼굴에 땀이 흘러야 네가 음식을 먹을 것이다.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하나님의 그 말씀에 귀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인간에게 죽음이란 자신과는 전혀 무관한 남의 이야기일 뿐이었습니다. 그러다가 셋 시대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자신이 ‘에노스’ 즉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것을 통감하고 자기 죽음을 자각한 인간이 비로소 하나님을 찾게 된 것입니다. 이후 창5장에 처음으로 인간 족보가 등장합니다. ”아담이 셋을 낳은 후 800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으며 그가 930세를 살다가죽었더라 셋은 105세에 에노스를 낳았고 에노스를 낳은 후 807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으며 그가 912세를 살다가 죽었더라 에노스는 90세에 게난을 낳았고 게난을 낳은 후 815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으며 그가 905을 살다가 죽었더라“ 이 족보의 강조점은 죽었다는 것입니다. 5장 5~부터 31절까지 족보에서 ‘죽었다’는 단어가 무려 8번이나 반복되어 있습니다. 이처럼 성경에 가장 먼저 등장하는 족보는 죽음의 족보입니다. 인간이 몇 년을 살든 모든 인간은 반드시 죽게 마련인 에노스라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통감하고서야 인간은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자발적으로 불렀습니다. 여기서 불렀다는 것은 사람의 이름을 부르듯이 한 번 불러 본것이 아닙니다. 히브리어 ‘카라’는 ‘초대한다’ 는 의미도 가지고 있습니다. 자기 죽음을 통감한 인간이 그제야 여호와 하나님을 자기 인생의 주인으로 모셔 들이고 하나님의 말씀을 비로소 좇기 시작한 것입니다. 왜 그랬을까요? 자신이 에노스임을 자각한 이상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 외에는 자기 죽음의 문제를 해결할 길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우리에게 주는 귀한 메시지는 자신이 에노스 임을 깨닫고 자신의 죽음을 인식한 자만이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날 수 있고 하나님의 말씀을 좇아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속한 크리스천임을 자처하며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종종 하나님의 말씀을 귀로 듣기만 할 뿐 마음으로 받아 삶으로 들어내려 하지 않습니다. 그 이유가 어디에 있는 것일까요? 이는 우리 자신이 ‘에노스’임을 아직 속속들이 절감하지 못한 채 마치 자신만은 천년만년 살 것 같은 착각속에 빠져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일차적 관심은 언제나 사는데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죽음은 항상 뒷전에 둡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정신을 못차릴 정도로 매일매일 바쁘게 살고 있지만 사실은 의미없이 하루하루 죽어 가고 있는 것입니다. 죽음을 배제한 삶의 토대는 물거품처럼 허망한 욕심에 지나지 않습니다. 어느 의대생은 시체해부 실습을 하면서 실험대에 누워 있는 시체를 보고 시체와 자신이 아무런 차이가 없음을 절감하게 되었답니다. 자신의 칼에 도려내지는 시체를 통해 언젠가 시체로 드러누울 자신을 본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실존에 대해 스스로에게 ‘나는 지금 대체 무엇을 위해 살고 있는가? 라고 질문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답니다. 그 죽음의 바탕 위에서 생에 대해 비로소 진지하게 생각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전7:4절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지혜로운 사람의 마음은 초상집에 있고 어리석은 사람의 마음은 잔치집에 가 있다“ 왜 성경은 자기 마음을 찬치집에 두는 자를 어리석다고 말할까요? 잔칫집은 언제나 흥겹기 마련이고 마음껏 먹고 마시는 곳입니다. 어리석은 자의 인생은 그렇게 자기 기분과 욕구만을 좇아 살다가 어느 날 느닷없이 찾아온 죽음과 함께 의미 없이 사라져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열심히 사는 것 같지만 매일 덧없이 죽어가는 것입니다. 그러하기에 지혜로운 사람은 매일매일 하루하루가 자기 죽음의 날일 수 있다는 자각 속에서 참된 삶을 추구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이 땅에 태어난 사람치고 죽지 않는 사람은 없습니다. 너 나 할것없이 모두에게 찾아오는 죽음은 결코 멀리 있지 않습니다. 어떤 스님의 ’무비공‘ 이라는 깨달음이 꽤나 유명하다고 합니다. ’무비공‘이란 문자 그대로 콧구멍이 없다는 뜻인데 산 자와 죽은 자의 경계가 어디입니까? 콧구멍인 것입니다. 코로 숨을 쉴 수 있으면 살아 있는 것이고 내뱉은 숨을 다시 들이키지 못하면 죽은 것입니다. 이 스님이 이것을 깨닫기 2천5백년 전 이사야 선지자는 똑같은 내용을 기록했습니다. 사2:22절에서 너희는 인생을 의지하지 말라 그의 호흡은 코에 있나니 수에 칠 가치가 어디 있느뇨라고 했습니다. 인간을 만물의 영장이라고 말하기 때문에 거창한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인생은 거창한 것이 아님을 오늘 말씀을 통해 배웁니다. 죽음도, 생명도, 모두 코 끝에 달려 있습니다. 이 세상의 모든 인간은 자기 코 끝에 죽음을 매달고 있는 것입니다. 죽음은 이렇게 가까이에 있습니다. 그렇다면 적어도 한 번쯤은 진지하게 생각해 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죽음을 코 끝에 매달고 있으면서도 마치 천년만년 살 것 같은 착각 속에서 하루하루 무의미하게 죽어 가는 인생보다 더 안타까운 일은 없습니다. 나의 호흡이 코 끝에서 사라짐과 동시에 무엇보다 먼저 나에 대한 사람들의 호칭이 바뀌어 버립니다. 비록 내가 의식불명인 상태로 중환자실에 누워 있을망정 아직 호흡이 있기에 사람으로 불립니다. 그러나 호흡이 멎는 순간부터 나에 대한 호칭은 ’시체‘로 바뀝니다. 사람과 시체의 차이를 아십니까? 그것은 사람과 달리 시체는 격리의 대상이라는 것입니다. 내가 아무리 가족들과 이웃으로부터 사랑받던 사람이었을 지라도 호흡이 끝나는 순간부터 그렇게 다정했던 가족들로부터, 그렇게 친밀했던 친구와 이웃들로부터 격리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리고 정한 시간이 되면 살아 있을 때의 옷을 벗습니다. 산 사람의 옷은 의복이라 부르는 반면 죽은 시체를 위한 옷은 수의라 합니다. 의복과 수의의 근본적인 차이는 옷의 재질도 다르지만 주머니의 유무입니다. 산 사람의 의복에는 주머니가 있는데 시체의 수의에는 주머니가 없습니다. 죽은 시체는 살았을 때 가지고 누렸던 이 세상의 그 어떤것도 가져갈 수 없습니다. 내가 이 세상에서 아무리 귀하고 높은 직책을 누렸을지라도 묘지 인부의 장화발에 밟히고 마는 것입니다. 어느 교회의 목사님이 교인의 아버지 이장을 집례 한적이 있었답니다. 인부가 관 뚜껑을 열었을 때 시커멓게 썩은 수의와 시신을 휘감고 있는 나무뿌리가 보였는데 그 보다 더 충격적인 것은 시신을 둘러덮고 있는 이름모를 징그러운 벌레들이었답니다. 인부가 몇차례나 구토를 하면서도 그 벌레들을 쫓으려다 포기하고 말았답니다. 그 때 상주가 목사님을 쳐다 보는데 이런 일은 상주가 하는 것이라 말했지만 할 수 없이 목사님도 벌레를 쫒기 위해 애를 써 보았지만 벌레들은 요지부동이었답니다. 나의 무덤이라고 예외일 수는 없습니다. 죽음이란 이런 것입니다. 마16:26절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을 바꾸겠는가? 자신이 에노스임을 자각한 셋 시대의 사람들처럼 온 중심을 다해 인격적으로 생명의 근원이신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불러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에노스에 지나지 않는 인간에게 참 생명을 주시려고 이 땅에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그분 안에서 죽음과 삶의 매듭을 확고히 맺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왜 예수님입니까? 그 어떤 에노스도 에노스를 살리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에노스 안에는 생명이 없기 때문입니다. 참 생명은 에노스 밖으로부터 죽음을 깨뜨리고 부활하신 예수님으로부터만 주어집니다. 본래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셨을 때 인간은 죽지 않는 존재였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범죄로 말미암아 하루 아침에 에노스가 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의 법은 죄의 삯을 사망으로 규정하고 있기에 죄인인 인간은 모두 죽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당신의 독생자이신 예수님으로 하여금 인간이 받아야 할 죽음의 형벌을 대신 받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여전히 죄인이지만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죄 값을 대신 치르신 예수님 안에서 인간의 죄를 용서하시고 의롭다 인정해 주신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예수님께서 인간의 구주가 되실 수 없습니다. 죄의 형벌에 관한 문제는 예수님의 죽음으로 해결되었을지라도 에노스인 인간에게 죽음은 여전히 미해결의 과제로 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죽으신 예수님의 부활이 필요합니다. 에노스도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예수님 안에 거함으로 죄 사함을 받고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됩니다. 이것은 전적으로 예수님의 부활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입니다. 한마디로 예수님의 부활은 기독교의 핵심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없었다면 기독교가 존재할수 없었고 모든 인간은 오늘도 그저 에노스로 허망하게 죽어갈 뿐일 것입니다. 인간이 에노스인 것은 모든 인간에게 가해지는 사망의 인력 때문입니다. 이 사망의 인력을 차단할 수 있는 힘을 지닌 인간은 그 어디에도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인간을 위해 이 땅에 보내신 예수님께서 사망의 인력을 깨뜨리시고 부활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망의 인력보다 더 큰 생명의 힘을 지니고 계십니다. 그 생명의 힘은 세상 어느 곳에서도 감소되거나 쇠퇴하지 않습니다. 누구든지 예수님 안에 거하면 그의 생명으로 사망의 인력을 부수시고 에노스의 구원자가 되십니다. 그러므로 더 이상 에노스는 에노스가 아니게 되었습니다. 이제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 죽음이란 단지 육체의 허물을 벗는 것일 뿐 그것은 전혀 새로운 시작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탄생을 전하는 신약성경 마1장은 이렇게 시작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라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고 이삭은 야곱을 낳고 야곱은 유다와 그의 형제를 낳고 유다는 다말에게서 베레스와 세라를 낳고 베레스는 헤스론을 낳고 헤스론은 람을 낳고.....엘리웃은 엘르아살을 낳고 엘르아살은 맛단을 낳고 맛단은 야곱을 낳고 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으니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 칭하는 예수가 나시니라“ 인간이 에노스임을 자각한 뒤로 등장한 구약성경의 첫 족보가 죽음의 족보였음에 반해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시작되는 신약성경의 첫 족보는 이처럼 생명의 족보입니다. 자신이 에노스임을 아는 자만이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참 생명을 구할 수 있습니다. 아멘 기도하겠습니다. 에노스에 불과하여 죽었던 인생들을 예수로 말미암아 살게하신 하나님 감사합니다. 죄로 말미암아 죽었던 인생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부활의 생명을 덧입게 하셨으니 이제는 에노스가 아니라 예수 안에서 산 자임을 깊이 자각하며 말씀을 따라 살게하여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 찬송: 288장 (예수를 나의 구주 삼고) *주기도로 예배를 마치겠습니다. 샬롬~~ |
|||||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