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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4월 30일 수요예배
운영자 2025-05-04 추천 0 댓글 0 조회 23

2025.4.30.(수)



시선이 닿는 산과 들마다 온통 초록이 점점 짙어지고 있어 참 아름답습니다.
하나님이 지으신 것들을 보실 때는 얼마나 더 아름다웠었을까요? 이 아름다운 계절에 하임가족 모두 두루 평안들 하신지요? 안부 드리며 수요 예배순서 올립니다.

* 묵상: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분이 말씀하신다. 이스라엘아 너를 만드신 분이 말씀하신다. 내가 너를 건져 주었으니 두려워하지 마라. 내가 네 이름을 불렀으니 너는 내것이다. 네가 바다를 건널 때 내가 너와 함께 하겠고 네가 강을 건널 때 휩쓸려가지 않을 것이다. 네가 불 속을 걸어갈 때 타지 않을 것이고 불꽃이 네 몸을 태우지 못할 것이다. 아멘 (사43:1~2)

* 기원: 우리를 만드시고 죄악에서 건져주시고 휩쓸려가지 않게 해주시고 불 속을 걸어갈 때 타지 않게 해주시는 좋으신 하나님을 경배합니다. 찬양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하나님을 찬양함으로 나아갑니다. 우리의 영혼이 온 맘과 정성 다하여 찬양하기 원합니다. 오늘도 길이 참으시는 하나님을 사랑하며 예배드리기 원합니다. 우리에게 정결한 영을 새롭게 하시고 홀로 영광 받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 신앙고백: (사도신경)
* 찬송: 286장
* 기도: 지순자권사
* 성경: 눅12: 22~34 ( 어떻게 살아야 할까? )

잠시 기도하겠습니다.
오늘도 여전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 예배하게 하시는 주님 감사합니다.
우리들의 예배가 몸만 왔다가는 시간이 아니라 몸과 마음으로 드리는 예배가 되기 원합니다. 성령으로 도우셔서 우리의 피곤함과 연약함들이 예배를 방해하지 못하도록 도우시고 말씀으로 새롭게하여 주옵소서 도우시는 주님을 의지하며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눅11:37~이하에서 예수님께서 유대 종교 지도자들의 외식에 대하여 여섯 가지로 그 잘못을 지적하며 화를 선고하심으로써 예수님과 그들의 관계는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악화되었습니다. 따라서 예수님뿐 아니라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조차 그들로부터 수난을 당하게 될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사실이 되었습니다. 이에 눅12장 1~12절에서 예수님께서는 장차 제자들이 박해를 당하더라도 두려워하지 말고 이겨 나가도록 권면의 말씀을 주고 계십니다. 그리고 16~21에서 어리석은 부자 비유를 통하여 탐심을 물리칠 것을 교훈한 예수님은 오늘 본문에서 의식주에 관한 교훈을 주고 계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눅12장을 통해 “까마귀를 생각하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으며 골방도 없고 창고도 없으되 하나님이 기르시나니 너희는 새보다 얼마나 더 귀하냐” (12:24)
“백합화를 생각하여 보아라 실도 만들지 않고 짜지도 않는다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다.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는데 하물며 너희는 얼마나 더 잘 입히시겠느냐” (12:27,28)

주님께서는 생각을 좀 해보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이 사용하신 단어는 아주 강한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생각을 하되 깊이, 그리고 철저하게 하라는 의미입니다. 하늘을 나는 새를 깊이 생각해 보고, 들에 피어 있는 꽃을 철저하게 한번 생각해 보라고 하십니다. 그것들도 하나님이 책임지고 기르시는데 왜 하나님의 자녀 된 우리의 삶을 책임져 주시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한번만 잠시라도 철저하게 생각해 본다면 불필요한 근심과 불안의 노예 상태로부터 해방될 수 있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믿는다고 하면서도 전혀 생각하려 하지 않는 자들을 향해 “믿음이 적은 자들아”라고 질타하셨습니다. 생각하지 않고는 결코 참되고 성숙한 믿음의 소유자가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롬12:1절을 모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이다” 이 말씀은 너희 손과 발, 너희 삶을 하나님께 드리라는 말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영적인 예배를 드린다는 것은 바로 우리의 이성을 동원하여 예배드린다는 뜻입니다.
우리를 정말 영적으로 깊이 이끌어 주는 것은 우리의 이성이 동원되는 예배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예배를 받으시는 주님이 곧 말씀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지,정,의가 동시에 어울어지는 이성적인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는 생각하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합니다. 정말 하나님이 이것을 기뻐하실까? 내 삶의 의미는 무엇인가? 하고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생각이 배제된 믿음은 맹신이 됩니다. 맹신은 우리를 파멸시킵니다. 신앙인은 언제나 생각하면서 살아가야 하고 생각하면서 믿어야 합니다.
어떻게 믿을 것인가? 어떻게 믿는 것이 참다운 바른 믿음인가?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그러려면 믿음의 정의를 새롭게 해야 합니다. 신앙에 대한 정의가 새로워지지 않는다는 것은 우리의 믿음이 성숙되지 않고 있음을 뜻합니다.
믿음은 순종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 자체가 순종의 사람이 되는 것을 뜻합니다. 무엇에 대한 순종일까요? 첫째는 하나님 말씀에 대한 순종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인생의 사용설명서와 같습니다. 믿음은 바로 그 인생 사용설명서인 성경대로 순종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는 많은 지식의 말들과 지혜의 말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 많은 말들이 우리 인생의 결정적인 순간에 우리를 도와주지 못한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를 정말 책임져 줄 말은 영원하신 하나님의 말씀밖에 없습니다.
두 번째 ‘믿음이 순종’ 이라는 것은 내게 주어진 상황에 대한 순종을 의미합니다. 내가 지금 어떤 상황에 처해 있든지 그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라는 믿음이 바른 믿음인 것입니다. 인생의 주관자가 되신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그분이 내게 주신 상황은 믿지 않고 배척한다면 하나님을 믿는 신앙의 도리일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찬송가 중에 이런 가사가 있습니다.
나의 갈길 다가도록 예수 인도 하시니
내 주 안에 있는 긍휼 어찌 의심 하리요
믿음으로 사는 자는 하늘 위로 받겠네
무슨 일을 만나든지 만사형통하리라
무슨 일을 만나든지 만사형통하리라

이 찬송은 어려서부터 맹인인 화니 크로스비의 작시입니다.
그녀가 가는 곳은 어디든지 걸림돌들 밖에 없을텐데 어떻게 만사형통하다는 것일까요? 그것은 자신의 상황이 하나님의 은총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였기 때문에 눈은 보이지 않지만 만사형통했던 것입니다. 그녀는 눈을 뜨고 볼 수 없는 것을 눈을 감고 있었기에 볼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낮은대로 임하소서’ 라는 영화의 실제 모델인 안요한목사님은
청운의 꿈을 가진 능력있는 사람이었답니다. 그런 그가 30대 초반에 맹인이 되었습니다. 30대가 넘은 사람이 하루 아침에 맹인이 되어 아내와 자식이 모두 떠나고 혼자 남은 그가 선택한 것은 죽음이었습니다. 그러던 그가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하나님을 만나고 그가 제일 먼저 한 일은 자신이 맹인이 되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순종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해로운 것을 주실 리가 없다는 믿음이 생긴 것입니다. 주어진 상황이 어떤 것이든 그 결과는 선하리라는 믿음입니다.
그 이후 안목사님은 맹인 선교를 하면서 집회도 다니게 되었답니다. 그리고 미국에서 만난 안과 의사가 정밀검사를 해 주었는데 수술만 하면 눈을 뜰 수 있다는 결과가 나왔답니다. 안과 의사는 무료 개안수술을 해 주겠다고 했는데 거절을 했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내가 두 눈을 뜨고서도 잃었던 하나님을 맹인이 되서야 만났는데 나는 평생 이대로 살겠다는 것이었습니다.

다윗은 “젊은 사자는 궁핍하여 주릴지라도 여호와를 찾는자는 모든 좋은 것에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라고 시34:10절에서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 때 다윗의 상황이 어떠했습니까? 자신을 죽이려고 쫓아다니는 사울 때문에 이스라엘에서는 더 이상 숨을 곳이 없어서 이웃나라 아비멜렉을 찾아가 침을 질질 흘리며 미친 사람 노릇을 하던 때입니다.
그런데도 “모든 좋은 것에 부족함이 없다”고 고백한 것입니다.
그는 이 상황을 주신분이 하나님이심을 믿었기에 가능한 고백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이런 상황을 주셨다면 이것을 통해서 반드시 유익을 주시리라는 믿음이 그런 고백을 가능하게 한 것입니다. 인생에 안개가 끼었습니까?
인생의 비행기가 지연되고 있습니ᄁᆞ? 원망하지 마십시오. 지연되었기 때문에 정체되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주시려고 하는 은혜가 있음을 감사함으로 받아들이는 것 그것이 바로 참된 신앙인의 삶의 자세입니다.

믿음은 용기입니다. 주어진 상황에 대한 순종이 신앙이라면 내게 어떤 상황이 주어지든지 그 상황속에서 순종하기 위해 용기가 필요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용기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모세가 가는 길에 홍해가 가로막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지팡이로 치라고 합니다. 지팡이로 쳤더니 바다가 갈라져서 좌우의 벽같이 섰습니다.
아무리 벽처럼 섰을지라도 깊고 푸른 엄청난 물이 양쪽으로 서 있는 것을 보면 그 속으로 지나간다는 것은 용기가 없으면 안됩니다.
그런데 그 속으로 들어가라고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애굽에 매장지가 없어서 우리를 이 곳으로 대리고 왔느냐”고 원망합니다. 그런데 모세는 가자고 합니다. 이것은 참믿음의 사람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입니다. 모든 사람이 다 부정한 방법으로 살아가고 세상 사람들이 나를 고지식하다고 놀리는 상황에서 정도를 걷기 위해서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믿음은 용기입니다. 성경에 있는 모든 믿음의 선진들은 용기의 사람들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쇠사슬에 묶인채 로마에 가서 토굴속에 갇혔습니다. 소망이 보이지 않는 상황입니다. 그런데 그는 토굴속에서 신약성경을 썼습니다. 주어진 상황을 받아들이는 용기가 없었다면 신약성경을 쓰기는커녕 토굴속에서 비참하게 죽어버리고 말았을 것입니다.
신앙이 용기라면 이 용기의 출처는 어디일까요? 용기의 출처가 내가될 때 나는 언제나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만용을 부리게 될 것입니다.
질 수 있는 용기, 양보하는 용기, 포기하는 용기를 갖지 못합니다. 져 주고, 포기하고 양보하는 용기, 참된 신앙을 갖기 위해서는 그 용기의 출처가 언제든지 하나님이어야 합니다.

여호수아는 모세의 시종으로 요즘말로 하면 대통령 비서실장입니다.
모세의 자식과 제사장들이 살아서 지켜보고 있는데 전혀 생각지 못하게 자신에게 차기 대통령을 맡으라는 것을 받아들이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그런데 여호수아 1장은 어떻게 시작합니까? “두려워 말라, 담대히 하라, 극히 담대하라. 마음을 강하게 하라”는 말씀이 반복해서 나옵니다. 무슨 뜻일까요?
여호수아가 벌벌 떨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여호수아는 자기에게 주어진 직책이 너무 무섭고 부담스러워서 벌벌 떨고 있었습니다. 카리스마 넘치는 모세 앞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떠했는지 다 알고 있는데 어떻게 자신이 이들을 이끌 수 있을까 두렵고 떨렸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여호수아야 믿음은 용기다. 용기를 가져라,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모세와 함께 했던것처럼 너와 함께 하겠다. 네가 어디로 가든지 나 여호와가 너와 함께하리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용기의 출처는 천지를 창조하신 여호와 하나님이시기에 여호수아는 그 길을 갈 수 있었습니다.

믿음은 시선입니다. 믿음은 하나님을 향한 시선입니다. 믿음은 용기이며 용기의 출처는 하나님이시므로 그 하나님을 늘 내 눈으로 바라보면서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광야로 부르시고, 다윗을 광야로 부르시고, 모세를 시내 산 위로 부르심으로 하나님을 향한 시선을 고종시켜 주셨습니다.

믿음은 다루어지는 것입니다. 앞에서 믿음은 하나님에 대한 시선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나의 시선을 강화하면서 하나님을 바라보면 하나님보다 더 크신 분은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이것이 대단히 쉬운일 같지만 사람들은 이것을 깨닫지 못합니다.
다윗은 하나님에 의해 철저하게 잘 다루어진 결과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절대로 사람에 의해 다루어지는 분이 아니십니다. 하나님보다 더 크신 분이 없으며 하나님의 방법보다 더 좋은 방법이 없다는 것을 깨닫고 “진흙과 같은 날 빚으사 주님의 형상 만드소서”라는 고백으로 그분의 손에 나를 전적으로 의탁하며 매일매일 하나님에 의해 다루어지는 것 그것이 믿음입니다.

믿음은 신실입니다. 우리가 정말 내 삶을 주님께 맡기고 하나님에 의해 다루어진다면 우리는 매일 매일 신실한 사람으로 바뀔 수 밖에 없습니다. 믿음이라는 말을 그리스말로 하면 피스티스라고 하는데 그 의미가 신실입니다. 그러니까 저 사람 “참 믿음좋다” 하는 말은 저 사람 “참 신실”하다는 의미입니다.
신실한 사람은 헛 것을 구하지 않고 남에게 해가 되는 것을 구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안이루어 주실 리가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에 의해 다루어지고 그 가운데서 우리의 삶이 신실한 삶으로 바뀌어야 합니다.

믿음은 눈에 보이는 것입니다. 신실하게 변화되어 가는 사람의 삶은 다른 사람의 눈에 보이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백부장의 이야기를 알고 있습니다. 백부장이 예수님을 찾아와 간청합니다. 우리 하인이 중풍에 걸렸으니 좀 고쳐주십시오. 예수님께서 흔쾌히 가서 고쳐주시겠다고 합니다. 백부장은 직접 오시지 않아도 명령만 하시면 하인이 나을 것이라 말합니다. 그 말을 듣고 예수님은 “내가 이스라엘에서 이만한 믿음을 보지 못하였다”고 하셨습니다. 백부장의 믿음을 눈으로 보신 것입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의 믿음을 보듯이 우리 믿음 역시 다른 사람의 눈에 보이고 있다는 시실을 잊으면 안되겠습니다. 다른 사람도 우리를 보고 우리가 진짜 그리스도인인지 아닌지 평가하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에게 우리가 어떤 모습으로 보이고 있는지 생각하는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믿음은 자기 발견입니다. 믿음은 눈에 보이는 것이라고 했는데 타인의 눈에만 보이는 것이 아니라 자기 눈에도 보이는 것입니다. 믿음은 자기를 발견하는 것입니다. 창4장에서 인간은 자기가 ‘에노스’라는 사실을 발견함으로써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를 발견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나를 발견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된 정체성을 발견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미운 오리 새끼가 오리처럼 살면서 늘 콤플렉스가 많았는데 어느날 자신이 오리가 아니라 백조라는 것을 알았을 때 그 후의 삶이 이전과 같았을까요?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리 새끼들 중에 살고 있는 우리에게 너 왜 거기 있어 너는 백조 새끼야 라고 가르쳐 주셔서 우리가 바른 정체성을 갖고 하나님의 자녀 다운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믿음은 자기 사랑, 자기 가꿈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된 자기 정체성을 발견했다면 그 다음부터는 하나님의 자녀된 자신을 사랑하고 가꾸어 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요 새로운 피조물 된 자신을 발견한다면 다시 더러운 욕망이나 죄로 우리 자신을 더럽힐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참으로 하나님의 자녀된 자신을 사랑하고 가꾸어야 합니다. 말씀과 진리로 계속해서 아름답게 가꾸지 않으면 진정으로 이웃을 사랑할 수 없습니다.
자기를 사랑한다는 것은 이기심이 아닙니다. 자기 존중입니다.
나를 존중히 여기는자가 남의 인생을 존중히 여길줄 앎니다. 내 가정을 존중히 여길 줄 아는 사람은 타인의 가정에 해를 끼치는 자가 되지 않습니다.
나를 존중한다면 다른 사람에게 하는 말 한 마디도 존중을 담아 할 수 있습니다. 그런 말을 통해 나도 가꾸어지고 남도 가꿀 수 있고, 주님의 말씀을 바르게 전하는 통로가 될 수 있습니다.

믿음은 자유입니다. 나를 진리로 가꾸다 보면 정말 자유하는 그리스도인이 됩니다. 구원이 무엇입니까? 자유입니다. 죄와 속박, 유혹, 죽음, 모든 것으로부터의 자유입니다. 내가 영원한 진리 안에 있을 때에만 죽음의 공포로부터 자유할 수 있습니다.
그 진리 자체가 영원하기 때문에 내가 영원한 생명 속에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감정에 집착하고, 사람에 대한 증오심에 집착하고, 우리가 계획한 일 자체의 성패에 집착한다면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습니다. 자기 감정에 자신을 가두지 마십시오. 자기 불안에 자신을 가두지 마십시오. 자유하십시오, 진리는 자유하는 것입니다.
믿음은 자유입니다. 믿음은 모든 상황으로부터, 모든 걱정과 불안으로부터 자유하는 것입니다. 이럴 때 우리의 신앙은 성숙해지고 완숙해 집니다.

믿음은 삶입니다. 지금까지 믿음을 아홉가지로 정리해 보았습니다. 이것을 한 마디로 귀결짓는다면 믿음은 삶이라는 것입니다.
믿음은 지속적인 삶입니다. 우리가 정말 하나님을 믿는다면 내삶 자체가 신앙이 되도록, 내 믿음이 다른 사람의 눈에 보이는 그리스도인이 되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그 때 신앙과 삶 사이에서 갈등하는 이중적인 삶에 종지부를 찍을 수 있습니다.

오늘 말씀의 제목이 어떻게 살아야 할까?입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살기 원하십니까? 말씀을 요약하겠습니다.
1) 말씀에 순종하고
2) 내게 주어진 상황에 순종하고
3) 용기를 내어 우리의 시선을 하나님께로 향하며
4) 하나님께 다루어져야 합니다.
5) 또한 신실한 믿음을 가지고 우리의 믿음을
6) 보이게 해야 합니다.
7) 믿음 안에서 나를 발견하고 내가 죽을 수 밖에 없는 존재인 에노스라는 것을 잊지 말고 살아야 합니다.
8) 하나님의 자녀된 정체성을 가지고
9) 진리의 말씀으로 자신을 사랑하며 가꾸며 살아야 합니다.
모든 죄와 속박, 유혹, 죽음으로부터 자유하며 살아가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 복 합니다. 아멘

* 찬송: 293장

* 주기도: 로 예배를 마치겠습니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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