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9월 24일 수요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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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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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묵상: 시100편 1-5절
온 땅이여, 여호와께 기뻐 외치라.기쁨으로 여호와를 섬기고 노래하며 그분 앞으로 나아가라.
여호와가 하나님이신 줄 알라. 그분이 우리를 만드셨으니 우리는 그분의 백성들이고 그 목장의 양들이다.
감사하면서 그 문으로 들어가고 찬양하면서 그 뜰로 들어가라. 그분께 감사하고 그 이름을 찬양하라.
여호와는 선하시니 그 인자하심이 영원하고 주의 진리가 온 세대에 걸쳐 지속될 것이다.
2.기원
3.신앙 고백
4.찬 양: 64장 “기뻐하며 경배하세”
5. 기도 인도: 지 순 자 권사.
6. 성경 봉독: 마태복음 5장 13-20절
7.말씀 선포: “세상 가운데서 Christians 은 누구인가?
<마태복음 5장 13-16절>
[13] 너희는 이 땅의 소금이다. 그러나 만일 소금이 짠맛을 잃어버리면 어떻게 다시 짜게 되겠느냐? 아무 데도 쓸 데가 없어 바깥에 버려지고 사람들이 짓밟게 될 것이다.
[14]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산 위에 세워진 도시는 숨겨질 수 없다.
[15] 등잔을 켜서 그릇으로 덮어 두지 않고 등잔대 위에 두어 그 빛을 온 집안사람들에게 비추는 것이다.
[16]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빛을 사람들에게 비추라. 그래서 그들이 너희 선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도록 하라.
[17] 내가 율법이나 예언자들의 말씀을 없애러 왔다고 생각하지 말라. 없애러 온 것이 아니라 완전하게 하러 온 것이다.
[18]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하늘과 땅이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 가운데 한 점, 한 획이라도 없어지지 않고 다 이루어질 것이다.
[19] 이 계명 가운데 아주 하찮은 것 하나라도 어기고 또 남에게도 그렇게 하도록 가르치는 사람은 하늘나라에서 가장 작은 사람이라고 불릴 것이다. 그러나 누구든지 이 계명을 지키며 가르치는 사람은 하늘나라에서 큰 사람이라고 불릴 것이다.
[20]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율법학자들이나 바리새파 사람들보다 더 의롭지 않으면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마태복음 5장에서 7장까지 예수님이 갈릴리 호수가의 산상(山上)에서 하신 말씀입니다. 다른 말로는 “산상 수훈(山上垂訓)”이라고 부릅니다. 이 ‘산상수훈’의 말씀은 불신자들이나 성경을 무시(無視)하는 사람들도 이 산상 수훈(山上垂訓)의 교훈 내용만큼은 높이 평가합니다. 왜냐하면, 그 내용이 매우 수준 높은 윤리 강령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각 장에서 한 대목씩만 예를들어 보면 이렇습니다.
*5:21절 이하는 실제로 살인한 사람만 심판을 받는 게 아니라 친구에게 미련한 놈이라고 욕하는 사람도 지옥 불에 들어간다고 경고합니다.
*6:2절 이하는 구제할 때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고 충고합니다.
*7:12절은 황금률(黃金律)로 알려진 교훈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일에 네가 대접받고 싶은 만큼 남을 대접하여라. 이것이 바로 율법과 예언서에서 말하는 것이다”
이 세상이 이런 말씀대로 돌아간다면 그야말로 천국(天國=Heaven)이라 부를만합니다. 그런데 이 세상은 오히려 거꾸로 돌아갑니다. 겉으로 표시만 나지 않으면 친구를 모욕하고 특정한 이들을 혐오합니다.
자신의 선행을 선전하는 것이 미덕처럼 받아들여집니다. 대접을 받으려고 애를 쓰지만 대접하는 일은 마음 내켜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아주 특별한 몇몇 사람은 모르겠으나 보통 사람들에게 산상수훈의 가르침은 멀고도 먼 이야기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도 여기에 예외가 아닙니다. 마태복음을 기록한 마태(Mathew)도 이런 가르침이 현실에서 지키기 힘들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비현실적(非現實的)으로 보이는 윤리 강령(倫理 降靈)을 강요받으면, 그리스도인들의 영혼이 맑아지기보다는 오히려 위축(萎縮)된다는 사실을 뚫어보았을 그가 왜 이렇게 엄청나게 부담되는 이야기를 하는 것일까요?
본문을 통하여 주시는 예수님의 말씀에서 이 세상 가운데서 Christians은 누구인가? 그리고 그 세상속에서 Christians은 어떤 역할을 하며 살아야 하는지를 깨닫소다합니다.
1. 유대 나라에서의 초대 기독교
오늘 본문 바로 앞 대목에는 ‘팔복(八福)’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런데 이 여덟 가지 축복의 덕목을 실제 복된 삶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 같습니다.
예를 들어 보자면, 가난한 사람, 슬퍼하는 사람, 온유한 사람,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으로 살기를 우리는 원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이 복이 있으리라 열거한 당시 사람들은 한마디로 침략국 Rome의 극심한 박해(迫害)를 받고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팔복’의 결론에 해당하는 5:11절을 들어보십시오. 읽겠습니다.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개역개정)
“너희가 나 때문에 모욕을 당하고, 박해를 받고, 터무니없는 말로 온갖 비난을 받으면, 복이 있다”
(새번역)
이 말씀은 당시 그리스도인들이 실제로 당한 고난과 박해에 대한 사실적(寫實的)인 표현입니다. 그들은 모욕(侮辱)받았고, 온갖 중상모략(中傷謀略)을 다 겪어야 했습니다. 그런 박해는 일차적으로 유대교로부터 받았던 것입니다. 이런 상황이 벌어진 계기는 수년에 걸친 反로마(Anti Rome) 유대 전쟁이 유대의 참담한 실패로 끝난 역사적 사건의 결과입니다. 로마군의 공격을 받은 예루살렘은 AD 70년에 완전히 괴멸(壞滅)되었습니다. 성전이 파괴되었고, 수많은 사람이 뿔뿔이 흩어졌습니다. 성전을 잃은 유대교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전통인 율법주의 신앙으로 돌아섰습니다.
그들은 자신들과 함께 회당 신앙을 유지하던 그리스도인들에게 율법을 강요했고, 그리스도인들은 시나브로(모르는 사이에 조금씩의 뜻) 회당에서 축출(逐出)당했습니다. 유대교의 종교재판과 로마의 정치재판에 넘겨졌습니다. 그 과정에서 그리스도인은 조롱과 박해를 당해야만 했습니다. 유대인들이 증인으로 나서서 그리스도인에게 온갖 불리한 말을 쏟아냈습니다.
복음서가 전하는 예수님의 재판 과정에서도 이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유대교 당국자들은 거짓 증언자들을 찾아서 피의자, 예수의 범죄 사실을 증언하게 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왜곡(歪曲)하거나 과장(誇張)하는 방식이었습니다. 예를 들어서 일종의 비유인 ‘성전을 허물라.’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성전 모독죄와 폭력 교사죄로 몰아갔습니다.
마태복음은 유대 기독교에 속한 사람이 유대인들을 위해 기록한 성경입니다. 그들 유대 기독교는 이방 기독교와 성격이 달랐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그들은 지역적으로 시리아-팔레스타인에 살던 유대인들로서 모든 생활 습관이 전통적인 유대교인들과 뿌리가 같았습니다.
사도행전 2장에 따르면 베드로는 여전히 유대교의 기도 시간을 지켰고, 성전을 출입했습니다. 사도 바울도 선교 여행 중에 어느 지역을 가든지 유대인들의 회당을 먼저 찾았습니다. 마태복음의 배경이 되는 유대 기독교인들은 가능한 한 유대교와의 연대감(連帶感을 잃지 않으려고 노력했습니다. 유대교 당국도 상당 기간 유대 기독교인들을 그대로 받아들였습니다.
예루살렘 교회의 대표 격인 예수의 동생 야고보(James)는 유대교 당국자들과 일정한 정도로 친분을 맺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AD 70년 유대 전쟁으로 인한 괴멸(壞滅)로 그런 관계가 유지되기 힘들었습니다. 정통 유대교가 유대 기독교를 불편하게 여기면서 유대 기독교인들을 박해하기 시작했습니다. 요즘 식으로 말해서 유대교가 기독교인들을 이단(異端)으로 내몬 것입니다.
‘그런 기회에 기독교가 따로 살림을 차리면 되지..’ 라고 생각할 분들이 있겠으나, 상황은 그렇게 녹록한 게 아니었습니다. 유대교로부터 분리된다는 것은 자신들의 미래가 불확실해진다는 의미입니다. 핵우산이라는 말이 있듯이 유대교라는 우산을 잃으면 비를 그냥 맞아야 했습니다. 로마 제국 시대에 유대교는 나름으로 종교로서의 독립성을 인정받았으나, 그 이후에는 기독교는 그야말로 그 이전에는 듣지도 보지도 못한 박해(迫害)가 시작되었습니다.
기독교가 로마 제국의 국가 종교로 승격한 AD 4세기 일은 지금 마태복음 공동체가 처한 1세기 후반에서 볼 때 전혀 상상할 수 없었습니다. 이제 유대 기독교는 유대교의 도움 없이 홀로 생존을 도모해야만 했습니다. 특히 유대교와의 경쟁에서 살아남아야 했습니다. 오히려 바리새파 사람들보다 더 철저하고 더 치열하게, 그리고 더 모범적이고 더 윤리적인 삶을 살아야 했습니다. 단순히 율법 조문을 잘 지킨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율법의 본래 정신을, 즉 율법의 본질을 추구하는 삶이어야 했습니다. 즉, 기독교인들에게 율법은 오늘날의 윤리 도덕 규범을 지키는 것, 곧, 실제적인 삶으로 나타내야 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이 천명하신 율법의 완성이었습니다.
2. 소금과 빛
본문13, 14절에서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의 소금’으로 규정됩니다. 귀가 닳도록 들었던 말씀입니다. 다시 읽어 봅니다.
“너희는 이 땅의 소금이다. 그러나 만일 소금이 짠맛을 잃어버리면 어떻게 다시 짜게 되겠느냐? 아무 데도 쓸 데가 없어 바깥에 버려지고 사람들이 짓밟게 될 것이다.”(13)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산 위에 세워진 도시는 숨겨질 수 없다.”(14)
“너희는 소금과 빛의 역할을 하라”가 아니라, “너희는 소금이다. 너희는 빛이다.”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말씀하십니다. 즉,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인 다움을 잃어버리면, 즉 자신의 정체성(正體性)을 잃어버리면 버림받는다는 뜻입니다. 당시 그리스도인들이 느꼈던 위기의식(危機意識) 이 얼마나 심각했는지를 이런 구절에서도 알 수 있습니다. 상황은 비유적으로 말하면, 기독교인들은 아직 성인이 되지 못한 아이가 집을 나와 독립한 상황과 비슷합니다. 부모의 도움으로 살던 시절과는 상황이 완전히 달라진 것입니다. 자기 스스로 돈을 벌어서 살아야 합니다. 자칫하면 세상에서 도태(淘汰)될 상황입니다.
이런 구절을 근거로 당시 그리스도인은 자신이 소금과 빛이 되려고 노력했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모범이 되고, 어려운 이들을 돕는 사람이 되는 되려고 부단히 노력했습니다. 16절에서는 이를 착한 행실이라고 말씀합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상살이에서 소금과 빛처럼 사는 그리스도인이 많아지면 세상이 교회를 다르게 보겠지요. 그렇게 살도록 노력하고 서로 격려해야 합니다. 그런데 평범한 그리스도인은 자신이 소금과 빛으로 살지 못한다는 사실 앞에서 오히려 낙심하거나 혼란스러울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저도 역시 세상의 소금과 빛이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는 없습니다.
헬라어 원어 성경에서(τὸ ἅλας τῆς γῆς와 τὸ φῶς τοῦ κόσμου) 13절에서 ‘땅의 소금’이라는 표현과 14절에 나오는 ‘세상 빛’이라는 표현입니다. 우리말 성경이나 KJV, NIV(the salt of the earth, the light of the world) 모두 동일게 번역 됩니다. 개역개정에서만 모두 ‘세상’에서로 번역하였습니다.
마태복음 기자는 흙으로 된 물리적인 세상과 사람들이 어울려서 사는 세상을 다 포괄함으로써, 그리스도인이 살아가는 삶의 우주론적 차원을 강조한 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즉, 이 뜻은 세상을 외면하고 골방에 숨어서 자기들끼리 밀의적(密意的)인 종교현상에 빠져들려는 유혹을 단호하게 거절하라는 말씀입니다.
앞에서 AD 1세기 말 그리스도인들이 심한 박해를 받았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바리새파와 서기관들로 재편(再編)된 유대교가 그리스도인들에게 율법을 강요하면서 벌어진 현상이라고 말입니다. 그들의 요구를 받아들이자는 그리스도인들도 분명히 있었을 것입니다. 유대교가 요구하는 율법을 지키면서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된다고요. 반면에 율법 자체를 폐기하려는 그리스도인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율법 폐기를 극단적으로 주장하는 이들을 가리켜서 요한계시록은 니골라당(니골라이테스=Nikolaites, 계 2:6)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들은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영적으로 구원받았으니 일체의 율법에서 해방되었다고 주장했습니다. 영육 이원론을 극단적으로 밀고 나간 영지주의(Gnosis)의 한 분파입니다. 유대 기독교를 대표하는 마태 공동체는 다시 유대교 전통으로 회귀하려는 율법주의를 수용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율법 해체론도 배격했습니다. 율법의 본질에 투철한 교회 공동체로 방향을 새롭게 정했습니다. 감당 못 할 윤리 강령과 동의하기 어려운 ‘팔복’을 언급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본문 마5:17절이 율법과 교회의 관계를 이렇게 설정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내가 율법이나 예언자들의 말씀을 없애러 왔다고 생각하지 말라. 없애러 온 것이 아니라 완전하게 하러 온 것이다”
아무도 율법을 완전하게 지킬 수는 없습니다. 율법을 완전하게 한다는 말은 앞에서 짚었듯이 율법을 문자적으로 지키는 데 열중한다는 게 아니라 율법의 본래 정신을 따른다는 것입니다. 율법 형식주의와 율법 폐기론이라는 양극단에 머물지 않고 율법의 본질을 향해서 한 걸음씩 앞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수행하듯이 쉬지 않고 나아가야 합니다. 예수께서는 그런 율법의 본질을 부단히 외치셨습니다. 예를 들어서 안식일을 위해서 사람이 있는 게 아니라 사람을 위해서 안식일이 있노라고 말입니다. 그런 삶의 태도가 곧 율법의 완성입니다.
3.천국 윤리(天國 倫理)
오늘날도 율법의 본질(本質)을 일상에서 온전히 지키며 살아 내기는 쉽지 않습니다. 철저하게 세속(世俗)의 원리로 작동하는 우리의 일상에는 본질이 잘 드러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저 사람이 율법의 본질을 향하는지 아닌지를 확인할 수 있는 녹음기나 사진기가 있는 것도 아닙니다. 예를 들어서 경제 윤리도 그렇습니다. 어떻게 윤리적으로 돈을 벌고, 어떻게 돈을 쓰는 게 율법의 본질에 합당한 것인지를 측정하기 어렵습니다. 먹고 사는 일에, 자녀를 키우는 일에 돈이 필요합니다. 사회 구호단체 등에 기부도 하고, 그리스도인이라면 헌금도 합니다. 이를 딱 부러지게 수치로 계량화(計量化)할 수 없습니다. 삶에 대한 관점이 완전히 다른 차원으로 들어가지 않으면 율법의 본질을 살아낼 수 없다는 뜻입니다. .... 19절 말씀을 들어보십시오.
“이 계명 가운데 아주 하찮은 것 하나라도 어기고 또 남에게도 그렇게 하도록 가르치는 사람은 하늘나라에서 가장 작은 사람이라고 불릴 것이다. 그러나 누구든지 이 계명을 지키며 가르치는 사람은 하늘나라에서 큰 사람이라고 불릴 것이다”
본문은 천국(the kingdom of heaven)에서의 평가가 세상에서의 평가와 완전히 다르다고 말씀합니다. 하나님 나라에서는 큰일과 작은 일 사이에 차이가 없습니다. 작은 일에 최선을 다하는 자는 큰일에 최선을 다하는 자와 똑같습니다. 그가 하는 일이 작다고 해서 작은 사람이 아닙니다. 큰일 쪽으로만 마음이 기울어진 사람은 오히려 천국에서는 작은 자가 됩니다.
성도님 여러분,
여러분은 동의가 되십니까? 여러분은 하나님 나라, 그의 통치, 그의 왕권을 어떻게 받아들이십니까? 예수께서 선포하신 천국, 즉 생명 왕권이 실감이 되십니까?
하늘 왕권을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그들은 서로를 향해 큰 소리로 노래했다.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분의 영광이 온 땅에 가득하시다.”(이사야 6:3)
모세의 호렙산 경험과 시내산 경험도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킵니다. ‘하나님의 선하신 능력이 우리를 휩싸고 있다.’라는 말씀도 하늘 왕권을 가리킵니다. 엄청난 일이나 소소한 일이나 차이 없이 일체가 하나님의 생명 왕권 안에 들어 있습니다.
지구에 숨 쉴 수 있는 공기가 골고루 퍼져 있듯이 말입니다. 미국에 살든지, 아프가니스탄에 살든지, 그리고 대도시 100평 아파트에 살든지 시골 단칸방에 살든지 숨쉬기에는 아무 차이가 없습니다. 대학교 총장이나 국회의원이 되었다고 해서 숨쉬기를 다른 사람보다 열 배나 더 많이 하는 게 아닙니다. 사람들의 관심과 존경을 삶의 중심으로 삼는 사람이라면 기를 쓰고 그런 자리에 올라서려고 하겠으나, 하나님의 사랑을 삶의 중심으로 삼는 사람이라면 하나님께 가까이 가는 일에 최선을 다할 겁니다.
문제는 우리가 천국(바실레이아 톤 우라논)을 제대로 실감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여러분은 지금 천국을 어떻게 실감하십니까? 이에 관한 작은 팁(Tip)을 말씀드립니다.
천국을 실감하려면 세상의 작동 원리를 일단 내려놓아야 합니다. 이 세상의 작동원리가 우리의 삶을 너무 과도하게 지배하고 있어서 천국에 마음을 줄 수가 없습니다. 이렇게 생각해보십시오. 여러분이 이미 하나님께 받은 것들에 집중하는 것입니다. 일용할 양식이 있다면 그것으로 얼마든지 행복할 수 있습니다. 무언가를 볼 수 있고 들을 수 있고 걸을 수 있다면 그것으로 생명 충만하게 살 수 있습니다.
사실은 우리가 가진 게 너무 많습니다. 일상에서 거품만 걷어낸다면 우리는 기뻐할 일이 너무 많다는 사실이 눈에 들어올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소소한 일에도 최선을 다하고, 그것으로 만족합니다. 거기서 하나님의 영광을, 그 생명 왕권을 경험하기 때문입니다. 더는 바랄 게 없는 충만함의 경지에 들어가서 기쁨 충만하게 사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 본문이 말씀하시는 천국에서의 큰 사람이고, 따라서 기독교인의 윤리에 충실한 사람입니다.
땅의 소금과 세상의 빛이라는 말씀으로 다시 돌아가십시오. 소금이 아니면서 소금 흉내를 내려면 얼마나 피곤하겠습니까? 빛이 아니면서 빛 흉내를 내려면 얼마나 민망하겠습니까?
내 존재가 소금으로 변화되었다면 굳이 짠맛을 내려고 노력할 필요도 없고, 존재가 이미 빛이라면 빛을 내려고 애쓰지 않아도 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고후 5:17)이, 즉 소금과 빛으로 변화된 사람들입니다. 천국 시민이 된 것입니다. 여러분의 소소한 일상에서 소금과 빛으로의 삶을 충만하게 누리기를 바랍니다.
4.감사하는 마음.
유대교 주류인 카발라 신비주의의 거장 렙베 나흐만(Rebbe Nachman, 1772-1810)이 죽은지 200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살아 숨쉬는 진리의 메시지를 현대인들에게 잔해 주고 있습니다.
그의 메시지는 어떤 경우라도 결코 희망을 잃지 말고 주위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 가운데서 기쁨과 행복의 원인을 찾아내라는 것입니다.
그의 명언집 <빈의자=The Empty Chair>에 나오는 내용 한 가지를 소개합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요즘 어떻게 지내느냐?” 물으시면 당신의 어려움을 무턱대고 호소하거나 불평을 토로하지 않도록 조심하십니오,
당신 “요즘 사는게 좋지않습니다.”고 한다면
하나님은 “네가 이 정도를 좋지 않다고 하니 정말 안 좋은 것이 어떤 것인지 한번 보여줄까?” 라고 말씀하실 것입니다.
반면에 요즘 내게 어떻게 지내느냐?는 질문을 받았을 때 “그저 감사할 다름입니다, 너무 좋습니다.”한다면
하나님은 “네가 이 정도를 가지고 좋다고 하니 그러면 정말로 좋은 것이 어떤 것인지를 보여 주고 싶구나.”라고 말씀하실 것입니다.
감사하는 마음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일깨워주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마땅히 가져야 할 마음가짐의 첫 단추는 감사하는 마음입니다.
수많은 직업군 중에서도 성직자들이 가장 장수하는 것은 그들이 작은 일이나 하찮은 일에도 감사하는 마음이 다른이들에 비해 훨씬 크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에덴 동산은 모든 것을 다 깆춘 지상낙원이었지만 거기에도 한 가지 빠진 것이 있었습니다.
그 좋은 환경 속에서도 성경어디를 보아도 감사하는 마음이 보이지를 않습니다.
이 한가지만 보더라도 감사를 잃어버린 마음의 상태만큼 사탄이 틈 타기 좋은 환경은 없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런면에서 감사하는 마음은 사탄의 공격을 근본적으로 차단하는 예방적 기능도 있습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우리는 지금 세상의 소금과 빛으로 돌아가십시오.
또한 작은 일 큰 일 가릴 것 없이 충성하십시오.
그리고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며 모든 것에 감사 하십니오.
이런 마음이 오늘주시는 주님의 바라심입니다.
Amen !!
8.찬 송: 254장 ”내 주의 보혈은“
9.폐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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