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9월 3일 수요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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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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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903 '수요 예배 순서'를 올립니다.
1.묵상: 전 12;11-14
지혜로운 사람의 말은 찌르는 채찍 같고 회중의 선생들이 단단히 박은 못과 같다. 이 모두가 한 목자에게서 받은 것이다.
내 아들아, 이것들 외에도 더 훈계를 받도록 하여라. 책은 아무리 많이 써도 끝이 없고 연구를 많이 하는 것은 몸을 지치게 한다.
모든 것의 결론은 이것이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분의 계명을 지켜라. 이것이 사람의 본분이다.
하나님께서는 선악 간에 모든 행위를 그 숨은 일까지도 낱낱이 심판하신다.
2. 기원
3. 신앙 고백
4. 찬양: 28장 ‘복의 근원 강림하사“
5. 기도: 최정숙 선교사
6. 상경 봉독: 전도서 9장 1-3절
7. 말씀 선포: ”인생살이의 지혜“
<전도서 9장 1-3절>
(1) 내가 이 모든 것을 생각하고 나서 결론을 내리기는 의인들과 지혜로운 사람들과 그들이 하는 일은 모두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고 그 누구도 자기 앞에 놓인 것이 사랑인지 미움인지 알지 못한다는 것이다.
(2) 모든 사람 앞에 놓인 운명은 다 같다. 의인이나 악인이나 선한 사람이나 나쁜 사람이나 정결한 사람이나 부정한 사람이나 희생제물을 드리는 사람이나 드리지 않는 사람이나 다 마찬가지다. 선한 사람도 똑같고 나쁜 사람도 똑같고 맹세하는 사람도 똑같고 두려운 마음에 맹세하지 못하는 사람도 똑같다.
(3) 이것은 해 아래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 가운데 악한 것이다. 모든 사람의 운명이 다 같으니, 곧 사람들은 마음이 악으로 가득 차서 미친 듯이 살아가다가 결국 죽은 사람들에게로 돌아가는 것이다.
30년 동안 일본, 중국에서 선교사로 사역한 로고스 라이프 찬양단의 차윤순 선교사가 쓴 「삶을 위한 정지」라는 책을 보면 이런 재미있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아프리카의 칼라하리 사막에 가면 스프링 밧크 라는 산양이 있습니다. 이들은 수백마리가 떼를 지어사는 것이 특징입니다. 사막은 물과 풀이 없는 곳입니다. 있어도 드문드문, 그것도 어쩌다 있을 뿐입니다.
이들은 물과 풀이 떨어지면 또 다른 삶의 터전을 찾아 길을 떠납니다. 나이가 많은 양들이 제일 앞에 서서 서서히 이동합니다. 며칠을 걷노라면 어느덧 이들 앞에는 푸른 초원을 펼쳐져 있습니다. 그러면 무리 중에 먼저 초원을 발견한 한 양이 그곳을 향해 달려갑니다. 옆에 있는 양은 자기 동료가 뜀으로도 덩달아 뜁니다. 뒤따르던 양은 앞에서 뛰니까 자기도 뜁니다. 맨 뒤에 선 양은 왜 뛰는지도 모르고 그냥 뜁니다. 마침내는 수백마리의 양떼들이 모두 달려가는 것입니다.
이렇게 달려가서 모두 물을 마시고 풀을 뜯으면 좋지만, 더러는 그렇지 못한 경우도 있습니다. 여러 날 이동에 지친 양들이 무엇인가 잘못보고 뛰기 시작하면 이들은 금방 떼를 지어 달리는 거대한 방향을 모르는 무리로 바뀌고 맙니다. 나중에는 자신들이 잘못 본 것을 깨닫고 정지(停止)하려 해도 뒤에서 몰려오기 때문에 정지(停止)하지 못합니다. 이들이 벼랑끝으로 몰리면 수백마리의 양떼들은 질주를 멈추지 못하고 다 절벽으로 떨어져 떼죽음을 당하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더 나은 땅을 찾아나선 삶을 위한 이동이 죽음의 행진이 되고만 것입니다. 살기 위해서 이 양떼들은 가던 길을 멈추어야 합니다. 삶을 위한 정지를 해야하는 것입니다.
이 글을 읽으면서 저는 새상 사람들 역시 스프링 밧크 양들과 같이 가는 길이 어디인지도 모르고, 돌아볼 겨를도 없이 죽음의 질주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살기 위해서 한 일이 죽음을 가져왔고, 잘 할려고 한 일이 나쁜 결과를 가져오는 일이 세상에는 비일비재(非一非再)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타난 전도자의 자세는 자못 진지합니다.
(1)절에서 "내가 이 모든 것을 생각하고 나서...."로 시작합니다.
즉, 저자는
*“자신이 마음을 다하여 생새각 해 보았고,
*지혜를 총동원하여 모든 일을 세밀히 연구해 보았고,그리고 자세히 살펴보기도 하였더니,
*그의 결론은 ”인간사 모든 것이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음을 알았디“
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성도님 여러분,
여러분들의 삶을 마음을 다하여 생각해 보신적이 있습니까? 이렇게 살면 어떤 결과가 돌아올 것인가? 연구해 보셨습니까? 그리고 나보다 먼저 그 길을 걸어간 사람들의 결과가 어떠했는지 자세히 살펴보셨습니까?
우리는 절대적으로 이렇게 해야할 필요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인생은 오직 한 번밖에 없는 일생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인생은 되돌아가서 다시 살 수 없는 시간입니다. 후회하지 않기 위해서, 삶을 허비하고 하나님 앞에 두렵고 떨리는 심정으로 서지 않기 위해서 우리는 마음을 다하고 연구하고, 지혜를 총 동원해서 그리고자세히 살펴보아야 합니다. 본문에서 저자는 자신이 그렇게 생각하고 연구하고 살펴본 결과를 말하고 있습니다.
전도자가 살핀 간접적인 결과이지만 우리가 받아들이면 우리에게 중대한 교훈이 되는 줄로 믿습니다.
전도자가 깨달은 진리를 살펴서 얻은 진리는 무엇입니까? 전도자는 어떻게 하는 것이 우리 인생의 지혜자될 수 있는지를 다르쳐주고 있습니다.
1. 하나님의 주권을 보는 지혜입니다.
"내가 이 모든 것을 생각하고 나서 결론을 내리기는 의인들과 지혜로운 사람들과 그들이 하는 일은 모두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고 그 누구도 자기 앞에 놓인 것이 사랑인지 미움인지 알지 못한다는 것이다. (1)
모든 인생들의 생사화복(生死禍福)은 다 하나님의 손안에 있습니다. 악인이나 의인이 모두 결국에는 삶의 모듬 것이 ”모든 것은 주님께 달렸습니다“라고 고백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실을 확실하게 믿는 사람들은 범사(凡事)에 담대하고 감사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요셉의 꿈 이야기를 듣고 형들은 심히 불쾌했습니다. 요셉이 오만방자하여 그런 말을 하는 것으로 알고 미워하여 그를 죽이고자 했습니다. 결국 르우벤이 막아서 그의 형들은 요셉을 죽이지는 아니하고 애굽에 종으로 팔아 넘겼습니다. 요셉은 하루아침에 아버지의 사랑받는 아들에서---> 종의 모습으로 전락해 버렸습니다. 보디발의 집에서는 그가 순전하게 믿음을 지키다가 이번에는 성 범죄의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혔습니다. 감옥에서 바로 왕의 술 빚는 관원장의 꿈을 해석해주었지만, 그는 까맣게 요셉을 잊고 있었습니다. 그 세월이 장장 13년이었습니다.
이 정도면 보통 사람이라면 이를 갈며 분노하는게 당연합니다. 이 모두가 형들 때문이었고, 억울하게 자신을 모함한 보디발의 아내 때문이었다고, 그러나 요셉은 총리가 되었을 때도 보디발과 그의 아내에게 복수하지 않았습니다. 아버지 야곱이 죽었을 때 형들에게도 복수하지 않았습니다. 두려워 떨고 있는 형들에게 오히려 어떻게 말합니까? 창50:18-20절입니다.
요셉이 형제들에게 말했습니다.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제가 하나님을 대신하겠습니까?
형님들은 저를 해치려고 악을 꾀했지만 하나님은 지금 보시는 것처럼 그것을 선하게 바꾸셔서 오늘날 많은 사람들의 생명을 구하셨습니다”
요셉은 자신이 고생한 모든 일들을 형들이 한 일로 보지 않았고, 다 하나님이 하신 일로 받아들였습니다. 사실 꿈을 주신 이도 하나님이시요, 형들이 팔지 않았더라면 요셉은 총리가 되지 못했을 것입니다. 꿈도 성취되지 못했을 것입니다. 요셉은 큰 고생을 했지만, 모든 것은 하나님의 주권(主權) 안에서 이루어진 일이요, 하나님이 행(行)하신 일이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고 해서 우리의 삶이 불신자들보다 편한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믿음의 연단을 더 받을 수도 있습니다. 저들이 당하는 일들을 우리도 다 겪게 되지만 주님의 보호의 손길 안에서 만나는 일이기에 안심할 수 있고 감사할 수 있습니다. 성도도 죽습니다. 그러나 믿는 자에게는 죽음도 축복이 될 수 있다고 성경은 가르쳐 줍니다.
"성도들의 죽음은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귀합니다"(시116:15)
죽음도 축복이라는 말씀의 의미를 아시겠습니까? 죽을 때까지, 아니 죽음 이후의 일들까지 성도에게 벌어지는 일은 다 하나님의 보호의 손길 안에서 벌어지는 일이요, 결과적으로는 모두가 다 축복이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안에 있는 자에게 보장되는 것이 무엇입니까?
① 하나님의 손에 있는 자는 영생을 보장받습니다.
"나는 그들에게 영생을 준다. 그들은 영원히 멸망하지 않을 것이며 어느 누구도 내 손에서 그들을 빼앗을 수 없다.
그들을 내게 주신 내 아버지는 모든 것보다 더 크신 분이다. 어느 누구도 그들을 내 아버지의 손에서 빼앗을 수 없다(요10:28-29)
② 하나님의 손은 승리의 삶을 보장합니다.
"저는 넘어지나 아주 엎드러지지 아니함은 여호와께서 손으로 붙드심이로다"(시37:24)
"그러니 두려워하지 마라. 내가 너와 함께 있다. 걱정하지 마라. 나는 네 하나님이다. 내가 너를 강하게 하고 너를 도와주겠다. 내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어 주겠다.
(사41:10)
인간의 생사화복이 하나님의 손 안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손은 악인에게는 두려운 심판이나 의인에게는 보호의 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의뢰하고 그의 뜻을 따르는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럴 때 우리는 범사에 담대함을 얻으며 승리할 수 있습니다.
2. 죽음이 확실하다는 것을 보는 것이 지혜입니다.
"(2) 모든 사람 앞에 놓인 운명은 다 같다. 의인이나 악인이나 선한 사람이나 나쁜 사람이나 정결한 사람이나 부정한 사람이나 희생제물을 드리는 사람이나 드리지 않는 사람이나 다 마찬가지다. 선한 사람도 똑같고 나쁜 사람도 똑같고 맹세하는 사람도 똑같고 두려운 마음에 맹세하지 못하는 사람도 똑같다.
(3) 이것은 해 아래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 가운데 악한 것이다. 모든 사람의 운명이 다 같으니, 곧 사람들은 마음이 악으로 가득 차서 미친 듯이 살아가다가 결국 죽은 사람들에게로 돌아가는 것이다.
세상에는 의인이 하나도 없다도 성경은 말씀합니다.. 모든 사람이 다 죄를 범하였으므로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죄의 삯은 사망입니다. 죄값으로 모든 사람은 다 죽습니다. 육신적으로는 의인도 죽고 악인도 죽습니다. 모든 인생들은 반드시 다 죽는다는 것을 사실을 언정해야 합니다.
창세기 5장을 보면 놀라운 사실이 있습니다.
"아담은 모두 930년 동안 살다가 죽었습니다"(창5:5)
즉, 아담부터 노아 홍수 이전까지의 사람들은 무려 1000년 가까운 세월을 살았습니다. 아담은 930세를 살았고, 무드셀라는 969세를 살았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그렇게 장수할 수 있었을까 놀라지만, 성경의 초점은 그들이 그렇게 오래 살았다는데 있지 않고 반드시 마지막은 죽음이라는데 있습니다.
태어난 사람은 다 죽게 되어 있습니다. "몇세를 향수(享壽)하고 죽었더라." 낳고 죽었더라는 말 속에 어떻게? 라는 삶의 내용이 포함될 뿐입니다. 왜 사람이 죽음이라는 것을 늘 인정하고 인식하고 살아야 합니까? 죽음을 생각하고 살아갈 때 삶이 진실해지기 때문입니다. 죽음 앞에 서면 사람은 누구나 숙연해지고 엄숙해집니다. 주님 앞에 서게 되는 날은 아무도 모릅니다. 그러므로 늘 긴장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성도 여러분은 죽음을 준비하고 살고 계십니까? 오늘이 저와 여러분 인생의 마지막 날이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여러분은 죽음을 준비하셨습니까? 죽음이 두렵지 않고,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아야 합니다. 죽음에 이르게 되면 인간은 모든 것을 포기하게 됩니다.
일생 동안 돈만 모으며 한 푼도 쓸줄 모르던 수전노(守錢奴)가 불치의 병을 얻어 죽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돈에 급급했던 사람이 뭐라고 했는지 아십니까?
"누구라도 나를 살려주면 내 재산의 절반이라도 주겠습니다!"
처음에 내놓은 것이 재산의 절반이었습니다. 나중에는 점점 그 양이 늘어났습니다. 마지막에는 전재산을 다 내놓았습니다. 그러나 돈이 아무리 많아도 그 돈을 생명을 살리거나 연장할 수는 없습니다. 죽음 앞에 이르면 땅에 것은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사람은 얼마나 오래 살았느냐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어떻게 살았느냐? 누구 안에서 살았느냐? 죽음을 준비했느냐?가 중요합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삶을 살고 있습니까? 누구 안에 있습니까? 그리고 과연 죽음을 준비하셨습니까?
2000 여년 전 갈보리 언덕 위에는 세 개의 십자가가 세워져 있었습니다. 세 사람 모두 십자가 위에서 죽었지만 세 사람의 죽음의 의미는 모두 달랐습니다. 예수님 좌편에 있던 강도는 자기의 죄값으로 죽었습니다. 예수님 우편의 강도는 육신은 죄로 말미암아 죽었지만 영혼은 예수님을 통해 구원받고 낙원으로 옮겨가는 죽음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아무런 죄없이 인류의 죄를 대신함으로 온 세상을 구원하는 죽음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죽으심으로 흘려주신 보혈을 자신을 위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영생을 약속하셨습니다.
죽음이 확실한 만큼 죽음에 대한 준비도 철저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을 믿으셨습니까? 여러분이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을 죽음이라는 시점으로 끌고와 평가해보십시오. 얼마나 그것이 가치있는 것입니까? 예수 믿을 때 죽음에 대한 공포가 사라집니다. 하나님이 그를 믿는 자에게 영생을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 믿음의 죽음에 대한 최고의 준비요, 유일한 준비입니다.
3. 인간의 전적인 부패를 보는 지혜입니다.
(3) 이것은 해 아래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 가운데 악한 것이다. 모든 사람의 운명이 다 같으니, 곧 사람들은 마음이 악으로 가득 차서 미친 듯이 살아가다가 결국 죽은 사람들에게로 돌아가는 것이다.
매일의 TV 뉴스를 보면, 밝고 긍정적인 소식은 거의 없습니다. 대부분 사회의 어두운 면을 전해주고 있습니다. 꼭 어두운 부분만을 꼬집어 밝히고 싶어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인간의 행위가 악함으로 밝고 아름다운 사건들이 그만큼 드문 것입니다. 사람 사는 곳 어디든지 다 그렇습니다. 해 아래서 행하는 모든 인간의 일들이 다 악합니다. 나름대로 선한 일을 한다고 하는 사람들도 그 목적은 자기를 위함에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받으셔야 할 영광을 도적질하는 악한 행위입니다.
"여호와께서 사람의 악이 세상에 가득한(관영) 것과 그 마음에 품는 생각이 항상 악하기만 한 것을 보셨습니다“(창6:5)
노아 당시에 세상에는 죄악(罪惡)이 가득 차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마음에 품은 생각과 계획도 항상 악할 뿐이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의 범죄는 노아의 때 이상입니다. 이 말이 과장된 말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사람의 마음입니다. 선한다고 말하는 사람들의 마음도 더럽기는 일반입니다. 워낙 세상에 악한 일이 많음으로 웬만한 일을 가지고는 놀라지도 않습니다. 그만큼 죄악에 대하여 많이 면역이 되어 있습니다. 너나 할것없이 악해져 있습니다. 더러는 큰 기대와 신뢰감을 가졌던 사람들의 죄악된 실상이 드러나면서 크게 실망할 때가 없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실망할 것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바로 인간의 본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옛날 시골에 가면 구정물통이 수도가에 놓여 있었습니다. 평상시에 구정물은 음식 찌꺼기가 다 밑으로 가라앉아 있습니다. 막대기를 가지고 휘적으면 온갖 지저분한 것들이 다 올라옵니다. 그게 바로 인간의 마음입니다. 나쁜 일, 나쁜 사람을 볼 때마다 이렇게 악할 수가 있을까? 놀라지 말고 그게 인간임을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자신의 자화상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너는 이럴 줄 몰랐는데....' 가까운 사람을 보고 놀라고 실망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게 인간입니다. 처음부터 인간이 그런 존재임을 알고 사는 것이 지혜입니다.
본문에는 일평생 죄악에 미친 마음을 품고 사는 것이 인간이라고 했습니다. 마음속에 있는 악이 발동할 때 인간은 미친 마음을 갖게 됩니다. 우리 속에 옛 성품이 발동할 때 미친 마음을 가지게 됩니다. 사람에게는 나름대로 양심에 대한 욕구가 있습니다. 바르게 살고 싶은 마음이 있습니다. 그런데 안 되는 것입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되지 않습니다. 어떻게 하면 그게 가능할까요? 성령충만을 받으면 가능하다고 성경은 가르쳐 주십니다. 내 힘으로도 나를 어쩔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붙잡아줘야 합니다. 이 부분에 대하여 믿음의 거장인 사도 바울이 이렇게 말씀합니다. 롬7:24절 말씀입니다.
”아, 나는 비참한 사람입니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구해 내겠습니까?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랴"(개역개정)
내 힘으로는 안된다고 했습니다. 내가 할 수 없는 그것을 성령이 내 마음에 오시면 할 수 있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늘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믿음으로 사는 사람이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를 받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아들들입니다"(롬8:14)
매일 매순간 성령의 충만을 받는 삶이 있어야 하는 이유입니다. 아무리 술취하지 않으려고 발버둥쳐도 안됩니다. 나도 나를 바꿀 수 없습니다. 남도 자신을 바꿀 수 없습니다. 어떻게 하면 바꿀 수 있습니까?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면 됩니다. 나 자신에 대하여 포기하면 할수록 하나님을 의지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나와 그가 주님 안에서 변화되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세계 시장에서의 한국 KTX 수주 성공의 비결)
하나님의 주권적인 손을 깨닫고, 죽음의 필연성을 알고 준비하며, 인간의 전적 부패를 알고 성령충만을 받고 살 때 우리는 진실한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Amen !!
8. 찬송: 435장 ”나의 영원하신 기업“
9 페회
1.묵상: 전 12;11-14
지혜로운 사람의 말은 찌르는 채찍 같고 회중의 선생들이 단단히 박은 못과 같다. 이 모두가 한 목자에게서 받은 것이다.
내 아들아, 이것들 외에도 더 훈계를 받도록 하여라. 책은 아무리 많이 써도 끝이 없고 연구를 많이 하는 것은 몸을 지치게 한다.
모든 것의 결론은 이것이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분의 계명을 지켜라. 이것이 사람의 본분이다.
하나님께서는 선악 간에 모든 행위를 그 숨은 일까지도 낱낱이 심판하신다.
2. 기원
3. 신앙 고백
4. 찬양: 28장 ‘복의 근원 강림하사“
5. 기도: 최정숙 선교사
6. 상경 봉독: 전도서 9장 1-3절
7. 말씀 선포: ”인생살이의 지혜“
<전도서 9장 1-3절>
(1) 내가 이 모든 것을 생각하고 나서 결론을 내리기는 의인들과 지혜로운 사람들과 그들이 하는 일은 모두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고 그 누구도 자기 앞에 놓인 것이 사랑인지 미움인지 알지 못한다는 것이다.
(2) 모든 사람 앞에 놓인 운명은 다 같다. 의인이나 악인이나 선한 사람이나 나쁜 사람이나 정결한 사람이나 부정한 사람이나 희생제물을 드리는 사람이나 드리지 않는 사람이나 다 마찬가지다. 선한 사람도 똑같고 나쁜 사람도 똑같고 맹세하는 사람도 똑같고 두려운 마음에 맹세하지 못하는 사람도 똑같다.
(3) 이것은 해 아래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 가운데 악한 것이다. 모든 사람의 운명이 다 같으니, 곧 사람들은 마음이 악으로 가득 차서 미친 듯이 살아가다가 결국 죽은 사람들에게로 돌아가는 것이다.
30년 동안 일본, 중국에서 선교사로 사역한 로고스 라이프 찬양단의 차윤순 선교사가 쓴 「삶을 위한 정지」라는 책을 보면 이런 재미있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아프리카의 칼라하리 사막에 가면 스프링 밧크 라는 산양이 있습니다. 이들은 수백마리가 떼를 지어사는 것이 특징입니다. 사막은 물과 풀이 없는 곳입니다. 있어도 드문드문, 그것도 어쩌다 있을 뿐입니다.
이들은 물과 풀이 떨어지면 또 다른 삶의 터전을 찾아 길을 떠납니다. 나이가 많은 양들이 제일 앞에 서서 서서히 이동합니다. 며칠을 걷노라면 어느덧 이들 앞에는 푸른 초원을 펼쳐져 있습니다. 그러면 무리 중에 먼저 초원을 발견한 한 양이 그곳을 향해 달려갑니다. 옆에 있는 양은 자기 동료가 뜀으로도 덩달아 뜁니다. 뒤따르던 양은 앞에서 뛰니까 자기도 뜁니다. 맨 뒤에 선 양은 왜 뛰는지도 모르고 그냥 뜁니다. 마침내는 수백마리의 양떼들이 모두 달려가는 것입니다.
이렇게 달려가서 모두 물을 마시고 풀을 뜯으면 좋지만, 더러는 그렇지 못한 경우도 있습니다. 여러 날 이동에 지친 양들이 무엇인가 잘못보고 뛰기 시작하면 이들은 금방 떼를 지어 달리는 거대한 방향을 모르는 무리로 바뀌고 맙니다. 나중에는 자신들이 잘못 본 것을 깨닫고 정지(停止)하려 해도 뒤에서 몰려오기 때문에 정지(停止)하지 못합니다. 이들이 벼랑끝으로 몰리면 수백마리의 양떼들은 질주를 멈추지 못하고 다 절벽으로 떨어져 떼죽음을 당하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더 나은 땅을 찾아나선 삶을 위한 이동이 죽음의 행진이 되고만 것입니다. 살기 위해서 이 양떼들은 가던 길을 멈추어야 합니다. 삶을 위한 정지를 해야하는 것입니다.
이 글을 읽으면서 저는 새상 사람들 역시 스프링 밧크 양들과 같이 가는 길이 어디인지도 모르고, 돌아볼 겨를도 없이 죽음의 질주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살기 위해서 한 일이 죽음을 가져왔고, 잘 할려고 한 일이 나쁜 결과를 가져오는 일이 세상에는 비일비재(非一非再)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타난 전도자의 자세는 자못 진지합니다.
(1)절에서 "내가 이 모든 것을 생각하고 나서...."로 시작합니다.
즉, 저자는
*“자신이 마음을 다하여 생새각 해 보았고,
*지혜를 총동원하여 모든 일을 세밀히 연구해 보았고,그리고 자세히 살펴보기도 하였더니,
*그의 결론은 ”인간사 모든 것이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음을 알았디“
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성도님 여러분,
여러분들의 삶을 마음을 다하여 생각해 보신적이 있습니까? 이렇게 살면 어떤 결과가 돌아올 것인가? 연구해 보셨습니까? 그리고 나보다 먼저 그 길을 걸어간 사람들의 결과가 어떠했는지 자세히 살펴보셨습니까?
우리는 절대적으로 이렇게 해야할 필요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인생은 오직 한 번밖에 없는 일생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인생은 되돌아가서 다시 살 수 없는 시간입니다. 후회하지 않기 위해서, 삶을 허비하고 하나님 앞에 두렵고 떨리는 심정으로 서지 않기 위해서 우리는 마음을 다하고 연구하고, 지혜를 총 동원해서 그리고자세히 살펴보아야 합니다. 본문에서 저자는 자신이 그렇게 생각하고 연구하고 살펴본 결과를 말하고 있습니다.
전도자가 살핀 간접적인 결과이지만 우리가 받아들이면 우리에게 중대한 교훈이 되는 줄로 믿습니다.
전도자가 깨달은 진리를 살펴서 얻은 진리는 무엇입니까? 전도자는 어떻게 하는 것이 우리 인생의 지혜자될 수 있는지를 다르쳐주고 있습니다.
1. 하나님의 주권을 보는 지혜입니다.
"내가 이 모든 것을 생각하고 나서 결론을 내리기는 의인들과 지혜로운 사람들과 그들이 하는 일은 모두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고 그 누구도 자기 앞에 놓인 것이 사랑인지 미움인지 알지 못한다는 것이다. (1)
모든 인생들의 생사화복(生死禍福)은 다 하나님의 손안에 있습니다. 악인이나 의인이 모두 결국에는 삶의 모듬 것이 ”모든 것은 주님께 달렸습니다“라고 고백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실을 확실하게 믿는 사람들은 범사(凡事)에 담대하고 감사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요셉의 꿈 이야기를 듣고 형들은 심히 불쾌했습니다. 요셉이 오만방자하여 그런 말을 하는 것으로 알고 미워하여 그를 죽이고자 했습니다. 결국 르우벤이 막아서 그의 형들은 요셉을 죽이지는 아니하고 애굽에 종으로 팔아 넘겼습니다. 요셉은 하루아침에 아버지의 사랑받는 아들에서---> 종의 모습으로 전락해 버렸습니다. 보디발의 집에서는 그가 순전하게 믿음을 지키다가 이번에는 성 범죄의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혔습니다. 감옥에서 바로 왕의 술 빚는 관원장의 꿈을 해석해주었지만, 그는 까맣게 요셉을 잊고 있었습니다. 그 세월이 장장 13년이었습니다.
이 정도면 보통 사람이라면 이를 갈며 분노하는게 당연합니다. 이 모두가 형들 때문이었고, 억울하게 자신을 모함한 보디발의 아내 때문이었다고, 그러나 요셉은 총리가 되었을 때도 보디발과 그의 아내에게 복수하지 않았습니다. 아버지 야곱이 죽었을 때 형들에게도 복수하지 않았습니다. 두려워 떨고 있는 형들에게 오히려 어떻게 말합니까? 창50:18-20절입니다.
요셉이 형제들에게 말했습니다.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제가 하나님을 대신하겠습니까?
형님들은 저를 해치려고 악을 꾀했지만 하나님은 지금 보시는 것처럼 그것을 선하게 바꾸셔서 오늘날 많은 사람들의 생명을 구하셨습니다”
요셉은 자신이 고생한 모든 일들을 형들이 한 일로 보지 않았고, 다 하나님이 하신 일로 받아들였습니다. 사실 꿈을 주신 이도 하나님이시요, 형들이 팔지 않았더라면 요셉은 총리가 되지 못했을 것입니다. 꿈도 성취되지 못했을 것입니다. 요셉은 큰 고생을 했지만, 모든 것은 하나님의 주권(主權) 안에서 이루어진 일이요, 하나님이 행(行)하신 일이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고 해서 우리의 삶이 불신자들보다 편한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믿음의 연단을 더 받을 수도 있습니다. 저들이 당하는 일들을 우리도 다 겪게 되지만 주님의 보호의 손길 안에서 만나는 일이기에 안심할 수 있고 감사할 수 있습니다. 성도도 죽습니다. 그러나 믿는 자에게는 죽음도 축복이 될 수 있다고 성경은 가르쳐 줍니다.
"성도들의 죽음은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귀합니다"(시116:15)
죽음도 축복이라는 말씀의 의미를 아시겠습니까? 죽을 때까지, 아니 죽음 이후의 일들까지 성도에게 벌어지는 일은 다 하나님의 보호의 손길 안에서 벌어지는 일이요, 결과적으로는 모두가 다 축복이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안에 있는 자에게 보장되는 것이 무엇입니까?
① 하나님의 손에 있는 자는 영생을 보장받습니다.
"나는 그들에게 영생을 준다. 그들은 영원히 멸망하지 않을 것이며 어느 누구도 내 손에서 그들을 빼앗을 수 없다.
그들을 내게 주신 내 아버지는 모든 것보다 더 크신 분이다. 어느 누구도 그들을 내 아버지의 손에서 빼앗을 수 없다(요10:28-29)
② 하나님의 손은 승리의 삶을 보장합니다.
"저는 넘어지나 아주 엎드러지지 아니함은 여호와께서 손으로 붙드심이로다"(시37:24)
"그러니 두려워하지 마라. 내가 너와 함께 있다. 걱정하지 마라. 나는 네 하나님이다. 내가 너를 강하게 하고 너를 도와주겠다. 내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어 주겠다.
(사41:10)
인간의 생사화복이 하나님의 손 안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손은 악인에게는 두려운 심판이나 의인에게는 보호의 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의뢰하고 그의 뜻을 따르는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럴 때 우리는 범사에 담대함을 얻으며 승리할 수 있습니다.
2. 죽음이 확실하다는 것을 보는 것이 지혜입니다.
"(2) 모든 사람 앞에 놓인 운명은 다 같다. 의인이나 악인이나 선한 사람이나 나쁜 사람이나 정결한 사람이나 부정한 사람이나 희생제물을 드리는 사람이나 드리지 않는 사람이나 다 마찬가지다. 선한 사람도 똑같고 나쁜 사람도 똑같고 맹세하는 사람도 똑같고 두려운 마음에 맹세하지 못하는 사람도 똑같다.
(3) 이것은 해 아래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 가운데 악한 것이다. 모든 사람의 운명이 다 같으니, 곧 사람들은 마음이 악으로 가득 차서 미친 듯이 살아가다가 결국 죽은 사람들에게로 돌아가는 것이다.
세상에는 의인이 하나도 없다도 성경은 말씀합니다.. 모든 사람이 다 죄를 범하였으므로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죄의 삯은 사망입니다. 죄값으로 모든 사람은 다 죽습니다. 육신적으로는 의인도 죽고 악인도 죽습니다. 모든 인생들은 반드시 다 죽는다는 것을 사실을 언정해야 합니다.
창세기 5장을 보면 놀라운 사실이 있습니다.
"아담은 모두 930년 동안 살다가 죽었습니다"(창5:5)
즉, 아담부터 노아 홍수 이전까지의 사람들은 무려 1000년 가까운 세월을 살았습니다. 아담은 930세를 살았고, 무드셀라는 969세를 살았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그렇게 장수할 수 있었을까 놀라지만, 성경의 초점은 그들이 그렇게 오래 살았다는데 있지 않고 반드시 마지막은 죽음이라는데 있습니다.
태어난 사람은 다 죽게 되어 있습니다. "몇세를 향수(享壽)하고 죽었더라." 낳고 죽었더라는 말 속에 어떻게? 라는 삶의 내용이 포함될 뿐입니다. 왜 사람이 죽음이라는 것을 늘 인정하고 인식하고 살아야 합니까? 죽음을 생각하고 살아갈 때 삶이 진실해지기 때문입니다. 죽음 앞에 서면 사람은 누구나 숙연해지고 엄숙해집니다. 주님 앞에 서게 되는 날은 아무도 모릅니다. 그러므로 늘 긴장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성도 여러분은 죽음을 준비하고 살고 계십니까? 오늘이 저와 여러분 인생의 마지막 날이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여러분은 죽음을 준비하셨습니까? 죽음이 두렵지 않고,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아야 합니다. 죽음에 이르게 되면 인간은 모든 것을 포기하게 됩니다.
일생 동안 돈만 모으며 한 푼도 쓸줄 모르던 수전노(守錢奴)가 불치의 병을 얻어 죽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돈에 급급했던 사람이 뭐라고 했는지 아십니까?
"누구라도 나를 살려주면 내 재산의 절반이라도 주겠습니다!"
처음에 내놓은 것이 재산의 절반이었습니다. 나중에는 점점 그 양이 늘어났습니다. 마지막에는 전재산을 다 내놓았습니다. 그러나 돈이 아무리 많아도 그 돈을 생명을 살리거나 연장할 수는 없습니다. 죽음 앞에 이르면 땅에 것은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사람은 얼마나 오래 살았느냐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어떻게 살았느냐? 누구 안에서 살았느냐? 죽음을 준비했느냐?가 중요합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삶을 살고 있습니까? 누구 안에 있습니까? 그리고 과연 죽음을 준비하셨습니까?
2000 여년 전 갈보리 언덕 위에는 세 개의 십자가가 세워져 있었습니다. 세 사람 모두 십자가 위에서 죽었지만 세 사람의 죽음의 의미는 모두 달랐습니다. 예수님 좌편에 있던 강도는 자기의 죄값으로 죽었습니다. 예수님 우편의 강도는 육신은 죄로 말미암아 죽었지만 영혼은 예수님을 통해 구원받고 낙원으로 옮겨가는 죽음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아무런 죄없이 인류의 죄를 대신함으로 온 세상을 구원하는 죽음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죽으심으로 흘려주신 보혈을 자신을 위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영생을 약속하셨습니다.
죽음이 확실한 만큼 죽음에 대한 준비도 철저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을 믿으셨습니까? 여러분이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을 죽음이라는 시점으로 끌고와 평가해보십시오. 얼마나 그것이 가치있는 것입니까? 예수 믿을 때 죽음에 대한 공포가 사라집니다. 하나님이 그를 믿는 자에게 영생을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 믿음의 죽음에 대한 최고의 준비요, 유일한 준비입니다.
3. 인간의 전적인 부패를 보는 지혜입니다.
(3) 이것은 해 아래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 가운데 악한 것이다. 모든 사람의 운명이 다 같으니, 곧 사람들은 마음이 악으로 가득 차서 미친 듯이 살아가다가 결국 죽은 사람들에게로 돌아가는 것이다.
매일의 TV 뉴스를 보면, 밝고 긍정적인 소식은 거의 없습니다. 대부분 사회의 어두운 면을 전해주고 있습니다. 꼭 어두운 부분만을 꼬집어 밝히고 싶어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인간의 행위가 악함으로 밝고 아름다운 사건들이 그만큼 드문 것입니다. 사람 사는 곳 어디든지 다 그렇습니다. 해 아래서 행하는 모든 인간의 일들이 다 악합니다. 나름대로 선한 일을 한다고 하는 사람들도 그 목적은 자기를 위함에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받으셔야 할 영광을 도적질하는 악한 행위입니다.
"여호와께서 사람의 악이 세상에 가득한(관영) 것과 그 마음에 품는 생각이 항상 악하기만 한 것을 보셨습니다“(창6:5)
노아 당시에 세상에는 죄악(罪惡)이 가득 차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마음에 품은 생각과 계획도 항상 악할 뿐이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의 범죄는 노아의 때 이상입니다. 이 말이 과장된 말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사람의 마음입니다. 선한다고 말하는 사람들의 마음도 더럽기는 일반입니다. 워낙 세상에 악한 일이 많음으로 웬만한 일을 가지고는 놀라지도 않습니다. 그만큼 죄악에 대하여 많이 면역이 되어 있습니다. 너나 할것없이 악해져 있습니다. 더러는 큰 기대와 신뢰감을 가졌던 사람들의 죄악된 실상이 드러나면서 크게 실망할 때가 없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실망할 것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바로 인간의 본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옛날 시골에 가면 구정물통이 수도가에 놓여 있었습니다. 평상시에 구정물은 음식 찌꺼기가 다 밑으로 가라앉아 있습니다. 막대기를 가지고 휘적으면 온갖 지저분한 것들이 다 올라옵니다. 그게 바로 인간의 마음입니다. 나쁜 일, 나쁜 사람을 볼 때마다 이렇게 악할 수가 있을까? 놀라지 말고 그게 인간임을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자신의 자화상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너는 이럴 줄 몰랐는데....' 가까운 사람을 보고 놀라고 실망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게 인간입니다. 처음부터 인간이 그런 존재임을 알고 사는 것이 지혜입니다.
본문에는 일평생 죄악에 미친 마음을 품고 사는 것이 인간이라고 했습니다. 마음속에 있는 악이 발동할 때 인간은 미친 마음을 갖게 됩니다. 우리 속에 옛 성품이 발동할 때 미친 마음을 가지게 됩니다. 사람에게는 나름대로 양심에 대한 욕구가 있습니다. 바르게 살고 싶은 마음이 있습니다. 그런데 안 되는 것입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되지 않습니다. 어떻게 하면 그게 가능할까요? 성령충만을 받으면 가능하다고 성경은 가르쳐 주십니다. 내 힘으로도 나를 어쩔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붙잡아줘야 합니다. 이 부분에 대하여 믿음의 거장인 사도 바울이 이렇게 말씀합니다. 롬7:24절 말씀입니다.
”아, 나는 비참한 사람입니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구해 내겠습니까?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랴"(개역개정)
내 힘으로는 안된다고 했습니다. 내가 할 수 없는 그것을 성령이 내 마음에 오시면 할 수 있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늘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믿음으로 사는 사람이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를 받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아들들입니다"(롬8:14)
매일 매순간 성령의 충만을 받는 삶이 있어야 하는 이유입니다. 아무리 술취하지 않으려고 발버둥쳐도 안됩니다. 나도 나를 바꿀 수 없습니다. 남도 자신을 바꿀 수 없습니다. 어떻게 하면 바꿀 수 있습니까?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면 됩니다. 나 자신에 대하여 포기하면 할수록 하나님을 의지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나와 그가 주님 안에서 변화되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세계 시장에서의 한국 KTX 수주 성공의 비결)
하나님의 주권적인 손을 깨닫고, 죽음의 필연성을 알고 준비하며, 인간의 전적 부패를 알고 성령충만을 받고 살 때 우리는 진실한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Amen !!
8. 찬송: 435장 ”나의 영원하신 기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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