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7월 9일 수요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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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7-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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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709 “수요 예배 순서” 올립니다.
1.묵상
2.기원
3,신앙 고백
4.찬양: 29장 “성도여 다 함께”
5.기도: 이 수임 권사
6.성경 봉독: 창세기 45장 1-15절
7.말씀 선포: “화해(和解)와 용서(容恕)”
오늘은 본문 성경, 창세기 45장 1-15절 말씀을 근거로 하여, 주님 은혜의 말씀 Series #2, “화혜(和解)와 용서(容恕)”라는 제목으로 주님이 주시는 은혜를 나누시겠습니다.
<창45:1-15>
(1)요셉이 자기에게 시종을 드는 사람들 있는 앞에서 더 이상 자신을 억제하지 못하고 소리쳤습니다. “모두 내 앞에서 물러가라!” 그의 곁에 아무도 없게 되자 요셉은 자기 형들에게 자신이 누구인지를 밝혔습니다.
(2)그리고 너무나 큰 소리로 우는 바람에 이집트 사람들이 그 소리를 들었고 바로의 궁정에서도 그의 울음소리를 들었습니다.
(3)요셉이 자기 형들에게 말했습니다. “제가 요셉입니다. 아버지께서 아직 살아 계십니까?” 그러나 형제들은 요셉 앞에서 너무 놀라 도대체 대답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4)요셉이 형제들에게 말했습니다. “제게 가까이 오십시오.” 그들이 가까이 오자 요셉이 형제들에게 말했습니다. “제가 형님들이 이집트에 팔아 버린 형님들의 동생 요셉입니다.”
(5) “하지만 형님들이 저를 이곳에 팔았다고 해서 근심하거나 자책하지 마십시오. 이는 하나님께서 생명을 구하시려고 저를 형님들보다 먼저 여기로 보내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6)2년 동안 이 땅에 흉년이 들었지만 앞으로도 5년 동안 밭을 갈지도 못하고 추수도 하지 못합니다.
(7)그러나 이 땅에서 형님들의 자손들을 보존하시고 큰 구원을 베푸셔서 형님들의 목숨을 살리시려고 하나님께서 미리 저를 보내신 것입니다.
(8)그러므로 저를 여기에 보내신 분은 형님들이 아니라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저를 바로의 아버지와 그의 온 집의 주인과 이집트 온 땅의 통치자로 삼으셨습니다.
(9)이제 어서 제 아버지께 가서 이렇게 말씀드리십시오. ‘아버지의 아들 요셉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저를 온 이집트의 주인으로 삼으셨으니 머뭇거리지 말고 제게로 내려오십시오.
(10)아버지께서는 고센 지방에서 저와 가까이 사시게 될 것입니다. 아버지와 아버지의 자식들과 손자들과 아버지의 가축들과 양들과 아버지의 모든 것들이 말입니다.
(11)아직도 흉년이 5년 더 남았으니 제가 아버지를 봉양하겠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아버지와 아버지의 집안과 아버지께 속한 모든 사람들이 다 가난에 처하게 될 것입니다’라고 말입니다.
(12)형님들과 제 동생 베냐민이 보는 대로 지금 말하고 있는 제가 바로 요셉입니다.
(13)형님들은 제가 이집트에서 누리고 있는 모든 영광과 형님들이 본 모든 것을 제 아버지께 전해 주십시오. 그리고 어서 빨리 제 아버지를 여기로 모시고 내려오십시오.”
(14)요셉은 자기 동생 베냐민의 목을 끌어안고 울었습니다. 베냐민도 요셉의 목을 끌어안고 울었습니다.
(15)요셉은 모든 형제들에게 입을 맞추고 울었습니다. 그런 후에야 그의 형들이 그와 이야기를 했습니다.
우리는 가족들 간의 관계에서 어쩌면 가장 많은 기대를 하는 것만큼 많은 상처도 받습니다. 그래서 가정들마다 아픔의 과거를 갖고 지내는 가정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러나 어떻게 과거의 갈등을 풀고 화해를 해 갈 것인가? 이것이 간단하지 않습니다.
보통 사람들이 과거의 상처를 풀어나가는 잘못된 해결방식 4가지가 있습니다.
첫째 거북이식 해결방법입니다.
이것은 문제로부터 거북이처럼 피해가는 방식입니다. 고통스러운 갈등의 문제 앞에서 이런 사람들은 무조건 도망가고자 합니다. “나를 괴롭히지 말아라, 나는 괴로운 문제는 생각하고 싶지도 않아” 하면서 자꾸 문제에서 도망가는 경우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나중에 더큰 문제를 맞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둘째 상어식 접근방법입니다.
상어처럼 문제를 승리의 관점에서 해결하고자 하는 방식입니다. 갈등의 문제 고통의 과거를 풀어나갈 때에 ‘내가 이기고 너는 져야 한다“는 방식에서 접근하는 경우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상대방을 패배시키기 위하여 자신이 이기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접근합니다. 이것도 옳지 않습니다.
셋째 아기곰 접근방식입니다.
아기곰같이 따뜻한 마음의 사람들이 쓰는 방식입니다.
이 사람들은 기분좋게 져줍니다. 자신이 잘못한 것도 없는데 먼저 잘못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마음속에는 상처와 불만이 쌓여갑니다. 무조건 양보하면서 해결하려고 하는 방식입니다.
넷째 여우식 접근방법입니다.
‘너도 양보해 나도 양보할께’와 같은 입장입니다. 그런데 양보하여서 해결되어지는 경우도 있지만 무조건 양보하여서 문제가 다 해결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양보하여서 문제는 해결할 때 해결이 안되는 문제가 여전히 남아있을 수 있습니다.
다섯째 부엉이식 접근방법입니다.
부엉이처럼 도망가지 않고 지혜롭게 해결하는 방식이 있다는 것입니다. 문제가 무엇인지를 직면합니다. 문제에서 도망가지 않고 직면하여서 문제를 잘 해결하여 가는 방식입니다.
직면하여 과거의 아픔과 미움의 문제를 해결하여 가는 것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오늘 본문에서의 요셉은 갈등의 문제와 아픔의 문제를 직면합니다. 그리고 형들과의 미움과 고통의 관계의 문제를 해결하였습니다. 우리가 이미 알고 있듯이 요셉은 17살의 나이에 형들에 의해서 외국에 종으로 팔려갔습니다. 그러니까 요즘식으로 말하면 요셉은 형들에 의하여 인신매매(人身賣買)가 된 것입니다. 창37:28절에서 ”요셉은 그의 형들로부터 미움을 받아왔던 그가 형들로부터 은20량에 팔린 후, 이스마엘 상인들이 그를 이집트로 데려갔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왜 형들이 요셉을 미워했습니까? 아버지 야곱이 12명의 아들 중에서 요셉을 특별히 더 귀여워하는 편애(偏愛)가 문제였습니다. 아버지 야곱은 요셉에게 지금으로 말을 하면 명품옷, ㅁ명품가방, 명품신발을 사준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요셉이 어느날 꿈을 꾸었는데 자기가 높아지고 형들이 낮아져서 머리를 굽히는 꿈을 꾸었다“고 말한 것 때문이었습니다.
그의 이복형(異腹兄)들 마음에 동생에 대한 미움의 감정을 갖고 있다가 집에서 멀리 떨어진곳에서 양을 치고 있던 어느날 자기들을 위해 도시락 배달을 온 요셉을 죽이려고 하다가 외국상인들에 판 것입니다. 그리고 결국에는 요셉은 애굽에 종으로 팔려가서 고생, 고생하다가 하나님이 주신 영감과 지혜로 꿈을 해석하던 중 애굽왕 바로의 꿈을 해석하다가 결국 애굽의 총리가 되었습니다. 나이 30살에 요셉은 총리가 되었지만 항상 형들과의 불편한 과거 때문에 마음이 무거웠습니다. 그러나 중동지역 모든 나라에 대 흉년이 들었고, ㄴ라마다 극심한 식량난이 일어나게 되어, 요셉의 꿈대로 준비를 잘 한 애굽은 이웃 나라 백성들에게까지 식량을 사러 올 수 밖에 없는 혹독한 시련이 닥쳐왔습니다.
그때 요셉의 형들이 가나안 땅에서 애굽에 식량을 사러 왔고, 마침내 요셉을 만나게 됩니다. 그리고 요셉은 상처를 주고 아픔을 준 형들과 직면하여 화해를 하게 됩니다. 요셉은 하나님이 주시는 화해의 은혜가 있었던 사람이었습니다.
오늘 우리의 삶에서 갈등과 상처의 과거를 갖고 힘들어하는 가정들, 개인들이 있을 것입니다. 과연 우리는 어떻게 화해해야 할까요?
1. 긍휼(矜恤)한 마음이 화해를 낳게 합니다.
1-2을 보십시오.
(1)요셉이 자기에게 시종을 드는 사람들 있는 앞에서 더 이상 자신을 억제하지 못하고 소리쳤습니다. “모두 내 앞에서 물러가라!” 그의 곁에 아무도 없게 되자 요셉은 자기 형들에게 자신이 누구인지를 밝혔습니다.
(2)그리고 너무나 큰 소리로 우는 바람에 이집트 사람들이 그 소리를 들었고 바로의 궁정에서도 그의 울음소리를 들었습니다.
요셉이 형들을 보고 감정을 억제하지 못하고 눈물을 흘립니다. 2절에서는 큰 소리로 울었다고 기록합니다. 개역성경에서는 방성대곡(放聲大哭)하였다고 기록합니다.
또한 14절-15절에서 요셉이 형들의 목을 끌어 안고 울었고, 입을 맞추며 울었다고 기록합니다. 요셉이 형들을 보고 눈물을 흘리는 그 의미가 무엇입니까? 원한과 증오의 눈물일까요? 아닙니다. 이것은 바로 형들을 용서하고 마음으로 품는 긍휼의 눈물일 것입니다.
긍휼(矜恤)이 무엇입니까? ‘불쌍히 여김. 가엾게 여겨 돌보아 줌.‘
저주받고 심판받아야 할 사람들에게 오히려 사랑을 베푸는 것입니다.
요셉이 그 형들을 저주하고 심판한다고 해도 솔직히 문제가 될 것없는 것처럼 보여집니다.
분명히 요셉의 형들이 잘못하였고 잘못의 대가(代價)를 지불받아도 할말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어떻게 말씀합니까? 원수갚는 것을 금하고 보복하는 것을 금하라고 가르칩니다. 왜냐하면 원수 갚는 것, 보복하는 것 그것은 또다른 원수를 낳고 보복을 낳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12장19, 20절 말씀입니다.
(19)“사랑하는 형제들이여, 여러분이 스스로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십시오. 기록되기를 “원수를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아 주겠다”고 주께서 말씀하십니다.
(20)“네 원수가 굶주려 있으면 먹이고 목말라 하면 마실 것을 주어라. 이로써 네가 그의 머리 위에 숯불을 쌓을 것이다.”
19절의 “기록되기를”=신32;35절 말씀의 인용입니다.
“복수하는 것은 내 일이다. 내가 갚아 줄 것이다. 때가 되면 그들의 발이 미끄러질 것이다. 그들의 재앙의 날이 가까이 왔고 그들의 멸망이 그들 앞에 갑자기 닥쳐올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향하여, “너희가 친히 원수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고 그리고 “네 원수가 굶주리거든 먹이고, 목말라 하거든 마시게 하라. 그리하면 내가 네희의 머리에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원수갚지 않고 하나님께 맡기면서 살아갈 때 어떤 유익이 있을까요?
여기 숯불은 은혜의 표라고 해석됩니다. 이것은 곧 핍박자와 긍휼과 사랑을 베풀면서 숯불같은 따뜻한 주님의 은혜를 경험하게 될 것이라고 약속하십니다.
우리가 이런 승리의 삶을 위해서 먼저 걸러야 할 것은 우리의 감정의 원리를 따르지 말아야 합니다. 분명히 요셉의 내면 속에 형들에 대한 상처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 감정이 100% 완전하게 치유되지 않았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감정의 원리대로 행동하지 않았습니다. 여러분 내가 그리스도인들은 감정에 충실한 사람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주님의 뜻에 충실한 사람들입니다.
성도님 여러분, 누가 긍휼의 눈물을 흘리면서 화해할 수 있습니까?
여러분이 누군가를 진정으로 용서하고 사랑하는 긍휼의 눈물을 흘리는 자리는 아무나 가능한 것은 아닙니다. 요셉은 형들에 의해 엄청난 마음의 상처를 받았습니다. 그 형들은 동생 요셉을 매정하게 거부하고 종으로 팔았습니다. 사람이 누군가에게 거부를 당한 경우처럼 가슴이 깊은 상처가 없습니다. 특히 가정의 가족들에게서 거부당하는 상처를 받은 것은 너무 깊은 충격이 됩니다.
그런데 요셉은 모든 거역을 치유받았습니다. 모든 분노를 치유받았습니다. 요셉이 거역과 분노를 뛰어넘어 긍휼의 사람이 될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그가 긍휼을 체험하였기 때문입니다.요셉은 바로 하나님의 긍휼을 체험한 것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긍휼을 체험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긍휼의 하나님이십니다. 본래 우리는 하나님 앞에 본질상 진노(震怒)의 자녀들 이었습니다. 본질상 우리는 하나님의 진노를 받아야 할 존재들 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진노의 대상으로 삼지 않으시고 긍휼의 대상으로 삼으시고 긍휼을 베풀어주셨습니다. 저와 여러분이 지금 이 자리에 있는 증거가 바로 하나님의 긍휼을 받은 증거입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지금도 우리가 하나님의 긍휼을 받고 있는 과정이라는 점입니다. 우리 중에 누가 하나님 앞에 범죄함 없이 완전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주께서 나를 어떻게 대하셨습니까? 우리 중에 아무도 주님 앞에 법대로 한다면 온전하게 나갈 사람이 없습니다. 이것이 긍휼이요 은혜입니다. 이제 우리가 사람을 대할 때 긍휼의 원리 은혜의 원리에 의하여 대할 수 있기를 주님은 기대하십니다.
주님이 나를 긍휼히 여기셨다면 이제 나도 다른 사람을 그렇게 대하면서 사는 것이 하나님의 사람들의 몫인 것입니다. 요셉은 그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경험한 사람입니다. 그리고 긍휼을 입은 대로 긍휼을 적용하였습니다. 자기를 종으로 판 형들을 긍휼히여기면서 화해한 것입니다. 긍휼의 원리대로 생각하고 긍휼의 방식대로 행동하는 삶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주님의 긍휼이 화해를 낳습니다. 주님의 긍휼이 가정을 화해하고 인생을 화해의 길로 인도하는 줄로 믿습니다.
2. 형제의식(兄弟意識)이 화해를 낳게 합니다.
3-4절을 보십시오.
(3)요셉이 자기 형들에게 말했습니다. “제가 요셉입니다. 아버지께서 아직 살아 계십니까?” 그러나 형제들은 요셉 앞에서 너무 놀라 도대체 대답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4)요셉이 형제들에게 말했습니다. “제게 가까이 오십시오.” 그들이 가까이 오자 요셉이 형제들에게 말했습니다. “제가 형님들이 이집트에 팔아 버린 형님들의 동생 요셉입니다.
요셉은 자기를 판 자들을 향해서 자기가 동생이라고, 즉, 그들을 여전히 형(兄)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요셉은 지금 애굽의 총리입니다. 형들은 식량이 없어서 구하러온 가난한 사람들에 불과합니다. 그런 형들을 무시하지 않고 여전히 ‘당신들은 나의 형입니다’라고 그들을 존중합니다. 그들을 형제로 여깁니다. 요셉은 형들을 나의 형이요 자신을 그의 동생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표현하는 것은 그가 형제의식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런 분들이 있습니다. 관계가 틀어지고 상처를 받으면 ‘관계단절((關係斷折)’을 선언합니다. 그런데 이것은 대단히 위험한 생각입니다. 이런 인생구조로 살게되면 결국 모든 사람들과 벽을 쌓고 고립된 삶을 살아갑니다. 여전히 문제가 있고 어렵고 상처받은 관계이지만 더불어 사는 형제의식을 가져야 합니다. 이것이 내가 사는 길입니다.
상처받고 힘이들고 어려워도 서로 상생(相生)하는 생각과 태도를 갖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주님이 원하시는 삶의 방식입니다.
우리가 요셉을 보면서 인생을 살면서 인간관계를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잘 볼 수 있습니다. 요셉은 한번 맺은 가족의 관계를 소중하게 생각하고 그 형제들과의 관계가 소중한 것을 잘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종종 내가 성공하고 내가 잘살게 되면 나보다 못한 가족, 힘들고 어려운 가족들을 외면(外面)하고 돌아보지 않는 경우가 있습니다. 종종 상처받고 힘들면 관계를 끓고 살아가는 마음의 벽(壁)을 쌓고 살아가는 경우가 있습니다. 형제의식이 없기 때문입니다.
만약에 요셉이 형들과의 관계를 형제의식을 갖지 않고 경쟁의식을 가졌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아마도 화해가 어려웠을 것입니다. 그러나 요셉은 비록 자기를 버린 형들이지만 여전히 형으로 의식하고 형제애(兄弟愛)로 대하였습니다.
창세기 4장에 보면 가인(Cain)과 아벨(Abel)의 이야기가 소개됩니다.
가인이 형이었고 아벨은 동생이었습니다. 그런데 가인의 제사는 인정(열납)되지 않고 동생의 제사가 인정(열납)되었습니다. 결국 가인은 분노하고 동생 아벨을 죽입니다. 인류 최초의 살인자가 그 가정에 있었습니다. 왜 가인이 동생을 향해 그렇게 분노했을까요? 가인은 자신이 공평하게 제대로 형 대접을 받지 못한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형인 자기의 제사를 받지 않으시고 동생인 아벨의 제사를 받으신 것입니다. 자신이 거절당할 때에 얼마나 분노가 났겠습니까? “내가 지금 불공평한 대접을 받고 있다”라고 할때 사람들은 울화가 납니까? 가인의 문제는 무엇입니까? 동생과의 관계중심의 형제의식을 갖지 않고 그는 동생이기 이전에 동생을 자기의 경쟁상대로 본 것입니다. “저 아벨 때문에 내가 손해를 보았어”저 아벨은 나의 경쟁상대이다 내가 저 인간만 없으면 더 인정받을 수 있을 텐데“라고 전혀 엉뚱한 방향으로 발전한 것입니다.
지나친 경쟁의식이 날은 참사입니다. 강한 사람들은 어떻습니까? 여유가 없습니다. 지나치게 긴장되어 있습니다. 조그마한 일에도 너무 많은 화를 냅니다. 표정이 항상 굳어져 있고 인상을 쓰고 다니게 됩니다.
이규태라고 하는 분이 쓴 “한국인의 의식구조”라는 책이 있습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공동체의식이 강한 선량한 이웃관계를 맺으면서 살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말과 문화를 보면 공동체의식이 강합니다. 말가운데도 ‘우리 마을, 우리 학교, 우리교회, 심지어는 우리 마누라“등으로 표현됩니다. 그런데 서양사람들은 우리라는 말보다는 나라는 말을, 우리라는 표현보다는 나라는 표현이 더 익숙합니다. 우리나라는 음식을 먹어도 상에 된장찌개 하나를 여럿이 함께 먹습니다. 그런데 서양 사람들은 자기 음식은 자기 혼자 놓고 먹습니다. 우리는 잠을 잘때에도 한 이불을 여럿이 덮고 잡니다. 그런데 그들은 자기 이불은 자기 혼자 덮고 잡니다. 우리는 마루에 앉을 때에도 더불어 함깨 앉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자기 의자에 혼자 앉습니다.
그러나 언제부턴가 이런 좋은 공동체의식, 형제의식이 점점 사라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세상만 그런 것이 아니고 교회도 그렇습니다. 형제의식 공동체의식은 “같이 죽고 같이 살자”입니다. 그러나 언제부턴가 경쟁의식의 관계를 맺는 사람들은 “너죽고 나살자” 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누구입니까?
한 하나님을 아버지로 한 형제들입니다. 한 성령님을 모시고 하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입니다. 서로 교회 속에서 형제의식을 갖고 화해의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세상에 불신자들과의 관계 속에서도 항상 주님처럼 화해의 삶으로 영광을 돌리기를 바랍니다.
3. 하나님의 섭리의식(攝理意識)이 화해를 낳습니다.
5절과 8절을 보십시오.
(5)하지만 형님들이 저를 이곳에 팔았다고 해서 근심하거나 자책하지 마십시오. 이는 하나님께서 생명을 구하시려고 저를 형님들보다 먼저 여기로 보내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8)그러므로 저를 여기에 보내신 분은 형님들이 아니라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저를 바로의 아버지와 그의 온 집의 주인과 이집트 온 땅의 통치자로 삼으셨습니다.
요셉은 하나님이 나를 애굽에 보내었다고 강조합니다.
그리고 요셉은 하나님이 나를 애굽의 통치자로 삼으셨다고 고백합니다.
요셉 자신이 한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형들이 한 일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자신을 이렇게 만든 이는 바로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이 자신을 팔아서 이곳에 왔고, 하나님이 자신을 세워 애굽의 총리로 세우셨다고 선언합니다. 바로 요셉은 하나님의 섭리를 믿었습니다. 여러분 참으로 놀랍지 않습니까!
여러분, 섭리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주권의 계획을 따라 하시는 방식입니다. 하나님의 대표적인 섭리의 일하시는 방식은 무엇입니까? 합력하여서 선(善)을 이루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섭리하시는 방식의 결론은 무엇입니까? 항상 선(善)의 섭리(攝理)라는 사실입니다. 바울 사도는 롬8장 28절애서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 곧 그분의 뜻을 따라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해 선을 이루는 줄을 압니다.”라고 고백합니다.
우리가 바라볼 것은 우리가 경험하는 모든 일 모든 경험들이 하나님의 섭리 중에 있음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사람이 한 것처럼 보입니다. 요셉의 입장을 본다면 분명히 형들이 요셉을 외국 상인에게 팔았습니다. 인간적인 안목으로 볼때에는 그렇습니다. 그러나 섭리의 관점에서 보면 ‘하나님께서 요셉을 판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믿음 생활을 할수록 그리고 더욱 성숙할수록 이 하나님의 섭리를 바라보게 됩니다.
물론 요셉도 처음에는 형들을 원망하고 욕하고 비난했을 것입니다. 어쩌면 그런 고난을 허용한 하나님을 원망하기도 하고 하나님을 떠나고 싶은 마음도 들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결국 요셉은 하나님의 섭리를 믿고 고백하고 증거하는 섭리의 의식이 있었고 섭리의 믿음이 있었습니다.
특별히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면서 하나님의 섭리의 중심에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대표적인 신적기관(神的機關)이 바로 가정과 교회입니다. 하나님의 축복이 가정과 교회를 통해서 오기도 하지만, 많은 상처들이 가정과 교회를 통해서 오기도 합니다.
성도님 여러분 !
성경을 보면 많은 사람들이 가정을 통해서 상처를 받고 고통을 받습니다.
아벨(Abel)이 가인(Cain)을 통해서 죽임을 당했습니다. 노아(Noah)는 아들 함(Ham)을 통해서 상처를 받았고, 함을 노아를 통해서 상처를 받습니다. 사라(Sarah)는 하갈(Hagar)을 통해서 상처를 받았고, 하갈은 사라를 통해서 상처를 받았습니다. 이삭(Isaac)은 이스마엘(Ishmael)에게 상처를 받았습니다. 야곱(Jacob)은 에서(Esau)에게 상처를 주고, 에서는 야곱에게 상처를 받았습니다. 모세의 가정, 다윗의 가정, 솔로몬의 가정, 선지자들의 가정 등, 많은 경건한 믿음의 가정들조차도 가정을 통해서 상처가 있고 고통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가장 가까운 관계의 가정을 통하여 일어난 상처와 고통 속에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가 있다는 것입니다.
모든 죄악과 고통을 넘어선 하나님의 섭리가 무엇입니까? 합력하여 하나님의 선을 이루시는 과정이라는 것입니다. 그 섭리 중에는 인간들의 인격(人格)을 연단하는 선(善)의 섭리가 있습니다. 그 섭리 중에는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이루시는 선의 섭리가 있습니다. 그 섭리에는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시는 선의 섭리가 있습니다.
여러분, 어떤 고통과 어려움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선하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악한 일을 당해도 실망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입니다. 우리는 악한 일을 선한 일로 마침내 이루어가시는 하나님의 선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 선의 하나님을 믿으신다면 이제 어떤 악함 가운데서도 선(善)한 믿음으로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선한 마음을 갖으시기 바랍니다. 선한 말을 하시기 바랍니다. 선한 행동을 하시기 바랍니다. 선하게 사람을 대하면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억울한 세상입니다. 악한 세상 고통의 세상입니다. 상처 많은 힘든 세상입니다. 그러나 항상 화해자로 살아가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시기 바랍니다.
노부부의 비극, 화해,
칠십이 넘은 노부부가 성격 차이를 이유로 황혼이혼(黃昏離婚)을 했습니다.
성격 차이로 이혼한 그 노부부는 이혼한 그날, 이혼 처리를 부탁했던 변호사와 함께 저녁 식사를 했습니다. 주문한 음식은 통닭이었습니다. 주문한 통닭이 도착하자 남편 노인은 마지막으로 자기가 가장 좋아하는 날개 부위를 찢어서 아내 노인에게 권했습니다.
권하는 모습이 참 보기가 좋아서 동석한 변호사가 어쩌면 이 노부부가 다시 화해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 순간, 아내 노인이 기분이 아주 상한 표정으로 마구 화를 내며 말했습니다.
"지난 사십 오년 동안 당신은 늘 그래왔어. 항상 자기중심적으로만 생각하더니 이혼하는 날까지도 그러다니... 난 다리 부위를 좋아한단 말이야.“
”당신은 내가 어떤 부위를 좋아하는지 한 번도 물어본 적이 없어. 당신은. 자기중심적이고 이기적인 인간이야"
아내 노인의 그런 반응을 보며 남편 노인이 말했습니다.
"날개 부위는 내가 제일 좋아하는 부위야. 나는 내가 먹고 싶은 부위를 사십 오년간 꾹 참고 항상 당신에게 먼저 건네준 건데... 어떻게 그렇게 말할 수가 있어. 이혼하는 날까지."
화가 난 노부부는 서로 씩씩대며 그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각자의 집으로 가버렸습니다.
집에 도착한 남편 노인은 자꾸 아내가 했던 말이 생각났습니다.
"정말 나는 한 번도 아내에게 무슨 부위를 먹고 싶은가 물어본 적이 없었구나. 그저 내가 좋아하는 부위를 주면 좋아하겠거니 생각했지. 내가 먹고 싶은 부위를 떼어내서 주어도 시큰둥한 반응을 보이는 아내에게 섭섭한 마음만 들고... 돌아보니 내가 잘못한 일이었던 것 같아.
나는 여전히 아내를 사랑하고 있는데... 아무래도 사과라도 해서 아내 마음이나 풀어주어야겠다."
이렇게 생각한 남편 노인은 아내에게 전화를 걸었습니다. 핸드폰에 찍힌 번호를 보고 남편이 건 전화임을 안 아내는 아직 화가 덜 풀려 그 전화를 받고 싶지가 않았습니다. 전화를 끊어버렸는데 또다시 전화가 걸려오자 이번에는 아주 전원을 꺼 버렸습니다.
다음날 아침, 일찍 잠이 깬 아내는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나도 지난 사십 오년 동안 남편이 날개 부위를 좋아하는 줄 몰랐네. 자기가 좋아하는 부위를 나에게 먼저 떼어내서 내게 건넸는데, 그 마음은 모르고 나는 뾰로통한 얼굴만 보여주었으니 얼마나 섭섭했을까? 나에게 그렇게 마음을 써주는 줄은 몰랐구나. 아직 사랑하는 마음은 그대로 인데... 헤어지긴 했지만, 늦기 전에 사과라도 해서 섭섭했던 마음이나 풀어주어야겠다"
아내가 남편 핸드폰으로 전화를 했지만, 남편은 전화를 받지 않았습니다. 내가 전화를 안 받아서 화가 났나, 하며 생각하고 있는데, 낯선 번호로 전화가 걸려왔습니다.
"전 남편께서 돌아가셨습니다." 남편 집으로 달려간 아내는 핸드폰을 꼭 잡고 죽어있는 남편을 보았습니다. 그 핸드폰에는 남편이 마지막으로 자신에게 보내려고 찍어둔 문자 메시지가 있었습니다. "미안해요. 사랑해요."
이 얼마나 안타까운 일입니까? 우리는 누군가에게 내가 먼저 화해의 손을 내밀고 사랑한다는 고백과 함께 행복의 관계를 회복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화해
역사가 요세푸스에 의하면 성소의 휘장은 1인치 두께로 질긴 염소털로 짠 것이었다고 합니다. “그것은 휘장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천정에서 마루까지 내려 달린 거대한 카펫과 같았다”고 합니다.
단단하게 짜여진 이 휘장은 쉽게 찢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아무나 함부로 들어갈 수도 없고, 들어간다 해도 그 거룩한 휘장을 위에서부터 칼로 찢는 다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막혀있던 하나님과 인간 사이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로 허물어진 것을 상징히는 의미로 하나께서 찢으신 것입니다.
거룩하신 하나님과 죄인들 사이에 있을 수밖에 없는 장벽들 가운데 극치였던 휘장이 찢어짐으로써, 하나님과 인간이 화목하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비로소 우리가 주님의 손을 잡고 휘장을 지나서 하나님께 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이제 말씀을 맺습니다.
우리는 비로소 주님의 손을 잡고 휘장을 지나서 하나님께 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가 가져야 할 자세가 있습니다.
첫째 우리는 항상 긍휼의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둘째 우리는 항상 형제 의식을 가져야 합니다.
셋째 우리는 항상 하나님의 선의 섭리를 믿어야 합니다.
요셉처럼 화해자, 용서하는 자로 우리 가정을 세우고, 교회를 세우고, 민족을 세워가는 화해의 도구로 쓰임받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Amen !!
8.찬송: 259장 “예수 십자가에 흘린 피로써”
9.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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