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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8월 13일 수요예배
운영자 2025-08-17 추천 0 댓글 0 조회 13

2025.8.13.(수)




체중이 줄고 숨쉬기가 힘들었던 여름도 이제는 입추도 지나고 말복이 지나고 나니 아침 저녁으로 선풍기와 에어컨의 도움이 없이도 잠을 자게됩니다. 정확한 절기를 주신 하나님을 찬송합니다. 모두들 주의 은혜 아래 평안들 하시지요? 수요 예배순서 올립니다.

* 묵상: 땅과 그 안에 있는 모든 것, 세상과 그 안에 사는 모든 것들이 여호와의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바다 위에 땅의 기초를 세우셨으며 물 위에 그 터를 세우셨습니다. 누가 여호와의 산에 오르겠습니까? 누가 그 거룩한 곳에 서겠습니까? 깨끗한 손과 순결한 마음을 가진 사람, 곧 마음에 헛된 생각을 품지 않으며 거짓으로 맹세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아멘 (시24;1~4)

* 기원: 바다 위에 땅의 기초를 세우시며 물 위에 그 터를 세우신 우리 주 여호와 하나님을 사랑합니다. 깨끗한 손과 순결한 마음을 가지고 예배하기 원하오니 우리를 살펴주시고 주의 보혈로 깨끗하게 씻어 맑게 해주셔서 우리 하나님께 기쁨과 감사로 예배하게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 찬송: 283장 ( 나 속죄함을 받은 후 )
* 기도: 명현옥집사
* 성경: 사도행전 2:1~21 ( 성령 충만으로 살기 원합니다 )
잠시 기도하겠습니다.

사도행전은 복음서와 서신서의 가교 역할을 하는 초대교회의 역사서로서 성령강림 이후 교회의 탄생과 확장을 기록한 성령행전입니다. 사도와 제자들을 통한 성령의 활동과 사역에 대해 구체적으로 다루며 복음이 어떤 경로를 거쳐 전 세계로 전파되었는지 생생하게 증언하고 있습니다. 전반부는 베드로, 후반부는 바울을 중심으로 기술했습니다.
누가복음의 후편이라 볼 수 있는 사도행전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사도들과 믿는 사람들에 의해 예루살렘부터 시작해 유대와 사마리아를 거쳐 이방 세계인 로마와 땅끝까지 전파되는 선교 역사를 기록한 책입니다. 그래서 사도행전은 ‘선교행전’이라고도 불립니다. 복음은 사도와 신자들에 의해 전파되었지만 이를 추진하는 주도적인 원동력은 성령이심으로 ‘성령행전’이라고도 합니다.
초대교회는 여러 가지로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종교적으로는 유대교의 도전과 박해를 받았고, 정치적으로는 로마의 압제를, 문화적으로는 그리스 사상으로부터 위협을 받았습니다. 사도행전은 이러한 공격으로부터 기독교를 변증하고, 보호하기 위해 기록된 ‘변증서’이기도 합니다.

오순절에 마가의 다락방에 있던 사람들에게 성령이 임하셨습니다.
그런데 각 사람 위에 성령이 임하실 때에 몇 가지 현상이 있었습니다.
첫째는: 청각적인 현상입니다. 급하고 강한 바람 소리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람 소리가 아니라 바람 같은 소리였습니다. 120명이 동시에 들은 하늘의 숨소리요 하나님의 호흡이었습니다.
둘째는: 시각적인 현상입니다. 불같은 혀들의 갈라지는 모습이 그곳에 있던 사람들에게 나타났습니다. 아마도 불꽃이 활활 타오를 때 이쪽 저쪽으로 갈라지는 것 같은 현상이었을 것 같습니다. 활활 타오르면서도 사라지지 않는 불이 거기 모인 모든 사람들 머리 위에 나타났습니다. 그 불은 사람을 변화시키는 불이었고, 능력을 덧입혀주는 불이었습니다.
셋째는: 전인적인 현상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았습니다.
그러자 그들이 성령의 말하게 하심을 따라 방언을 말했습니다. 성령 충만은 사람의 영과 혼과 몸을 성령이 임하셔서 다스리시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가 무엇으로 주님을 바르게 믿을 수 있습니까? 오직 성령의 도우심과 은총으로만 가능합니다. 성경적인 용어로 말씀드리면 성령충만으로만 가능합니다. 성령님의 도우심과 성령 충만함 없이는 영이신 하나님을 바르게 알 수 없고, 따를 수도, 본받을 수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성령 충만함이 없이 바른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는 길은 존재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나라 교회들에는 성령 세례와 성령 충만을 혼동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성령 세례는 우리가 물세례를 평생 한 번 받는것과 같이 평생에 한 번 받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 세례를 받았기 때문에 우리는 평생 성령 충만한 삶을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성령 충만은 욕망으로부터 자유함입니다.
요7:38~39절을 보면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하시니 이는 그를 믿는 자의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성령님에 대해 제일 먼저 말씀하신 기록입니다.
그렇다면 성령 충만함이란 무엇이겠습니까? 배에서 생수의 강이 터지는 것입니다. 이 말씀의 구체적인 의미는 무엇일까요? 인간의 배는 더러운 탐욕의 상징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사람이 받아서는 안 될 불의한 돈을 받았을 때 그 사람이 불의한 돈을 ‘받았다’고 하지 않고 ‘먹었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이 배는 더러움의 상징 욕망의 상징이기 때문입니다.
육체적으로도 인간의 배는 만병의 근원입니다. 모든 병이 무절제함으로 인해 배에서부터 내장과 위장으로부터 비롯되는 경우가 태반입니다. 그러므로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는 이 말씀은 더러운 욕망과 탐욕으로부터 자유할 때만 성령 충만함이 가능하다는 뜻입니다. 성령 충만과 욕망은 절대로 병립 즉 나란히 설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정말 성령 충만한 사람은 욕망으로부터 자유하는 사람입니다. 아직 욕망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한 사람은 그 사람의 기도가 아무리 유창하다 해도 그는 성령 충만한 사람일 수 없는 것입니다. 욕망으로부터 자유하고 성령 충만한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서는 한 가지 중요한 전제가 있습니다. 바로 자족입니다. 지금 있는 상태에 만족할 줄 아는 것입니다. 믿음도 성령 충만도 거기서부터 시작합니다.

사도 바울은 빌4:11~13절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내가 자족하기를 배웠습니다.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습니다. 내게 능력 주시는 분 안에서 내가 모든 일을 감당할 수 있습니다.”
얼마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는 구절을 좋아하는지 모릅니다. 욕심에 가득찬 사업가 탈세하고 불법으로 장사하는 사무실에도 이 성구를 걸어 놓습니다. 사도 바울은 뭐라고 얘기합니까? 풍부하든지 궁핍하든지 욕망의 노예가 되지 아니하고 자족할 줄 알 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자족하지 못하는 상태에서는 성령 충만이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천지를 창조하신 성령님, 나의 체질을 나보다도 더 잘 아시는 성령님, 나를 낳아 주신 부모님보다도 내 성정을 더 잘 아시는 성령님께서 나와 함께하심에도 불구하고 내 주머니에 돈이 없다면 지금은 돈이 없어야 하는 때이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사람이 그리스도인입니다.
지금 내가 병들었다면 병들지 않고서는 주님과 더 깊은 교제가 불가능하기에 나와 함께하시는 성령님께서 나를 아프게 하셨음을 받아들이는 사람이 성령 충만한 사람입니다.
성령 충만은 말씀으로 가득참입니다.
요한복음 14:26절에서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께서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쳐 주실 것이며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실 것이다.” 성령님께서 우리에게 주님의 말씀을 기억나게 하시고 생각나도록 도와 주신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의 전제는 말씀이 내 안에 가득 차 있어야 성령님께서 말씀이 기억날 수 있도록 나를 도우실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못하면 성령님도 우리를 도우실 수가 없습니다.

성령 충만은 삶으로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5:26절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내가 아버지깨로부터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부터 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분이 나에 대해 증언해 주실 것이다.“ 성령님의 사역은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것입니다.
성령님은 아버지 안에도 계셨지만 성자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도 계시던 영이시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만을 증거하십니다.
그러므로 누가 성령 충만한 사람입니까? 그 삶 자체가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사람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거한다는 것은 그분의 사랑안에 거하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 자신의 의지만으로는 주님을 증거하는 삶을 사는데 한계가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그리스도의 사랑안에 거하고 내 중심이 예수님을 향하고 있을 때 나의 불완전함과 유한함으로 행할수 없는 것을 성령께서 채워주시고 세워주시므로 우리는 주님을 증거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성령 충만은 책망에 귀 기울이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6:7~8절을 보면 ”그러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하다. 내가 떠나가지 않으면 보혜사가 너희에게 오시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가면 너희에게 보혜사를 보내 주겠다.
보혜사가 오시면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해 세상을 책망하실 것이다.“
‘책망’ 이라는 단어에 주목해야 합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으로부터 위로받기를 원합니다. 성령님을 가리켜서 보혜사라고 하는데 이 명칭은 ‘위로자’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분명히 우리를 위로해 주시는 분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하나님은 우리를 위로해 주시지만 위로만 하시는 분은 결코 아닙니다. 성령님은 끊임없이 우리를 책망하시는 분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누가 성령 충만한 사람입니까?
그는 위로의 차원을 뛰어넘어 성령님의 책망에 귀 기울일 줄 아는 사람입니다.
우리가 지금 나이가 얼마이든 어떤 형편에 살고 있든 현재의 모습으로 살게 되기까지 얼마나 많은 책망이 있었겠습니까? 부모님으로부터 사랑의 책망, 선생님으로부터 사랑의 꾸지람, 등등 만약 그분들의 책망이나 꾸지람이 없었다면 우리는 얼마나 형편없는 오만한 사람들이 되어있을지 모릅니다.
성경에서 ‘죄’를 가르키는 그리스어 ‘하마르티아’는 과녁에서 벗어났다는 의미입니다. 궁수가 활을 쏘았을 때 그 과녁에 꽂힌 화살은 죄가 아닙니다.
세상 사람들은 과녁과 벗어난 화살만 봅니다. 그래서 그 과녁 앞에서 사람을 야단치고 책망합니다. 그러나 쏜 화살이 과녁을 벗어났다는 것은 과녁판에 문제가 아니라 이미 조준이 잘못된 탓입니다.
눈에 보이는 과녁판에 대한 책망은 사람이 합니다. 그러나 성령님께서는 눈에 보이지 않는 우리 마음속의 잘못된 조준을 책망하십니다. 따라서 성령의 책망으로 우리의 잘못된 생각이 조정되지 않으면 우리가 화살을 쏘지 않았기 때문에 아직 과녁판을 벗어나지만 않았을 뿐 잠재되어 있는 죄성은 기회만 있으면 튀어나오게 마련입니다.
책망에 귀 기울이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합니다. 책망 속에서 우리는 정직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으며 우리가 정직해야만 이 사회를 살리는 소금이 되고 사회를 밝히는 빛이 될 수 있습니다.

성령충만은 진리 가운데 거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6:13절은 성령의 사역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자의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듣는 것을 말하시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성령님께서 하시는 사역은 우리를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성령 충만한 사람은 진리 가운데 있는 사람입니다. 진리의 영이신 성령님은 함부로 말씀하시지 않으십니다. 진리 가운데 있다는 것, 성령 충만하다는 것은 함부로 말하지 않는 것입니다. 사람의 말에는 죽이는 독이 있습니다.
이것을 알고 말을 삼가는 사람이 성령 충만한 사람입니다. 성령 충만한 사람은 자기 말을 하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사람입니다. 예배시간에 똑같은 말씀을 들어도 우리 각자에게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바는 다 다릅니다. 그 이유는 우리의 삶의 자리가 다 다르기 때문입니다. 같은 말씀이지만 이 말씀을 통해서 내게 하시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 귀 기울여 듣는 자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듣는 법을 훈련해야 합니다. 내가 소리내어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러나 내가 울 수밖에 없는 이 상황을 하나님께서 왜 주셨는지, 내게 무엇을 요구하시는지 깨닫기 위해서는 하나님 앞에 무릎 꿇고 침묵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엘리야가 호렙 산에 올라갔을 때 하나님께서는 대단히 중요한 것을 일깨워 주셨습니다.(왕상19장)
”엘리야야 내가 이제 너에게 말할테니 너는 들어라“ 엘리야가 귀를 세웠습니다. 폭풍이 불었습니다. 얼마나 큰 바람이었는지 바위가 쪼개졌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그 속에 없었습니다. 지진이 일어났습니다. 온 땅이 뒤흔들리고 갈라졌습니다. 그러나 그 속에도 하나님의 말씀은 없었습니다. 불이 떨어졌습니다.
그 속에도 역시 하나님의 말씀은 없었습니다. 만약 하나님의 말씀이 폭풍처럼 강하게 지진처럼 요란하게 불처럼 뜨겁게 날마다 임한다면 그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할 자가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의 음성은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적막 가운데 세미하게 들려 왔습니다. 진리는 인간의 소란함 속에서 포착할 수가 없습니다. 진리는 정적 속에서만, 고요 속에서만 들립니다. 그래서 침묵의 깊이 만큼 우리의 영성은 깊어져 가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6:13절에서 성령님이 우리에게 장래 일을 알려주신다 했습니다.
진리 안에 있는 사람, 성령 충만한 사람은 그 시선이 장래 곧 미래로 향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성령님은 진리의 영이시며 진리는 영원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열심히 기도한다 해도 그 시선이 눈앞에만 고정되어 있으면 우리의 삶은 더 이상 성숙해지기 어렵습니다.
진리가 영원하다는 것을 믿는다면 믿음의 본질은 영원한 생명 위에 있음을 안다면 우리의 시선은 먼 곳을 향해야 합니다. 가나안을 보는 자만이 광야를 거침없이 걸어갈 수 있고, 그 광야에서 믿음의 용장으로 성숙해 갈 수 있습니다. 누가 성령 충만한 사람입니까? 내일을 보는 사람입니다. 그 때 우리의 삶을 통해서 영원하신 하나님의 나라는 날마다 확장되어 가는 것입니다.

성령 충만은 주님의 영광만 드러냅니다.
요한복음 16:14절 말씀입니다. ”그가 내 영광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겠음이니라.“ 성령님께서 하시는 사역은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만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 충만한 사람은 오직 주님의 영광만을 나타내는 사람입니다.
때로 성령 충만하다고 하는 사람들 중에 주님의 자리보다 자기 자리를 더 위에 올려 놓는 겨우를 보게 됩니다. 그럴 때 그를 통해서 어떤 은사가 드러난다 할지라도 그는 성령 충만한 사람일 수가 없습니다.
마태복음7:23절에서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그때 나는 그들에게 분명히 말할 것이다. 나는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썩 물러가라“
진정으로 성령 충만한 사람은 성령의 열매를 맺는 자이고, 성령의 열매는 인격이 변화될 때만 맺히는 것입니다. 성령의 은사는 인격의 변화가 없이도 가능하지만 그러나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온유와 절제 같은 성령의 열매는 인격의 변화 없이는 맺을 수 없습니다.
인격이 변화된 사람은 어떤 경우에도 주님의 영광만을 드러냅니다.

성령 충만은 그리스도의 깊은 호흡을 지닙니다.
요한복음 20:21~22절 말씀은 ”예수께서 또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이 말씀을 하시고 저희를 향하사 숨을 내쉬며 가라사대 성령을 받으라.“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숨을 내쉬며 ”성령을 받으라“ 하셨습니다. 성령 충만한 사람은 어떤 사람이라야 할까요? 그리스도의 깊은 호흡을 지닌 사람입니다.
깊은 호흡이라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깊은 호흡은 삶의 의미 나의 사명관과 관련된 것입니다.
내 삶의 의미를 그리스도 안에서 분명하게 찾을 때 우리는 깊은 호흡을 지닐 수 있게 됩니다. 이것을 다른 말로 하면 이성적인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입니다. 내가 지금 두 발을 딛고 있는 이 곳에서 내게 주어진 사명을 분명하게 찾은 사람입니다. 내 삶의 의미를 분명히 안다면 내 나이가 어떠하든 아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모세는 80세에 사명을 받고 120세까지 그의 기력이 쇠하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그 속에서 얼마든지 성령께서 요구하시는 사명, 나만이 할 수 있는 사명을 다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이성을 다해서 하나님과 교제하려는 그 이성만이 우리에게 깊은 영적 호흡을 갖게 해 주는 것입니다.

성령 충만은 인간 지경의 확장입니다.
사도행전 9:17~18절을 보겠습니다. ”아나니아가 떠나 그 집에 들어가서 그에게 안수하여 가로되 형제 사울아 주 곧 네가 오는 길에서 나타나셨던 예수께서 나를 보내어 너로 다시 보게 하시고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신다 하니 즉시 사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어져 다시 보게 된지라 일어나 세례를 받고“
아나니아가 예수님을 만난 사울에게 와서 성령 충만하라고 안수를 해 주었을 때 바울에게 나타난 첫 번 째 현상은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어진 것이었습니다.
이처럼 성령 충만은 눈에서 비늘이 벗어지는 것, 새로운 세계에 대한 눈을 뜨는 것입니다. 이것이 행전 2장의 결론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오순절 날 성령님이 강림하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오순절은 유월절로부터 50일째 되는 날입니다. 히브리 사람들은 이 날을 ‘맥추절’이라고 불렀습니다. 이 날은 처음 나온 밀과 보리를 하나님께 드리는 날이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 날 제자들이 모여 있는 방에 성령님께서 임하셨습니다.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나고 불의 혀같이 갈라지는 것이 보이면서 성령님께서 임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공통된 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그 현상을 본문 4절은 이렇게 증거합니다.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 시작하니라.“
많은 사람들은 성령님께서 임하시는 오순절 날 방언을 했기 때문에 방언을 매우 중요시합니다. 이 날 성령님께서 말하게 하심을 따라 제자들이 말했던 방언은 무엇일까요? 본문 8~13절은 말씀을 보면 ”우리가 우리 각 사람의 난 곳 방언으로 듣게 됨이 어찌된 것이냐?“라고 말합니다. 그들은 무려 14곳이나 되는 각기 다른 나라에서 왔기 때문입니다.

이 날의 방언은 흔히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사람들이 알아들을 수 없는 천사의 언어 같은 것이 절대로 아니었습니다. 성령님께서 그들에게 임했을 때 인간과의 대화의 벽이 허물어지고 말이 소통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성령 충만이 무엇으로 나타났습니까? 나와 달랐던 사람, 이제까지 나와 전혀 상관이 없다고 생각했던 사람들에 대한 지경의 확장으로 나타났습니다.
성령님께서 우리에게 임하시는 성령 세례는 사람마다 그 모양이 다 다를 수 밖에 없습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급하고 강한 바람 소리 같이, 어떤 사람에게는 지진이 흔들리는 것과 같은 소용들이 속에서 성령 세례가 임할 수도 있고 어떤 사람에게는 너무나 고요하게 임하셔서 성령님이 임하셨다는 것을 깨닫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이와 같이 그 형식은 다르지만 본질은 같습니다. 그 본질은 모두 인생의 획을 긋는 사건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랑이 필요합니다. 성령 세례는 내가 이제까지 알던 사람들끼라만 살던 세계, 나와 기호가 같고 적성이 같은 사람들끼리만 만나던 세계를 탈피하고 주님께서 만드신 모든 사람들에게로 지경이 확장해 가는 획이 그어지는 사건입니다. 그래서 성령 세례를 받은 사람은 더 많은 사람들과 더불어 살아가기 위해서 성령 충만함이 필요합니다.

진리 가운데 서야 하는 것, 예수님의 영광을 드러내며 살아가야 하는 것, 말씀으로 우리를 채워가야 하는 것, 이 모든 것은 한 사람이라도 더 많은 사람들과 더불어 살아가기 위함입니다. 이것은 다른 말로 우리가 늘 사도신경을 통해서 고백하는 것처럼 ”거룩한 공회와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과 죄를 사하여 주시는 것과, 몸이 다시 사는 것과, 영원히 사는 것을 믿사옵나이다“라는 것입니다.
각자 자신에게 가만히 질문해 보십시오.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오는 동안에 나의 인생에 분명한 획이 그어졌던 적이 있습니까? 예전에는 나 중심으로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만 선택해서 살았는데 어느 순간 내가 이해할 수 없는 사람들을 이해하려고 노력하게 되고 그들의 입장에서 서서 생각하게 되고, 그들과 더불어 살아가게 된 시점이 분명히 있습니까? 그렇다면 불같은 것이 내게 떨어진적이 없다해도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를 듣지 못했을지라도 나는 거룩한 공회요 성령 충만한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내 우물 속에 갇혀 지내시는 분이 아닙니다. 온 세계를 창조하신 분입니다. 그 모든 사람들과 더불어 그리스도 안에서 복음을 전하며 함께 살아가도록 우리를 자녀로 불러 주시고 당신의 영을 우리에게 부어주셨습니다.
저와 여러분을 통하여 하나님의 거룩한 나라가 지경을 넓혀가며 확장되어 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말씀을 생각하며 잠시 함께 기도하겠습니다.

* 찬송: 286장 ( 주 예수님 내 맘에 오사 )

* 주기도: 예배를 마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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