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8월 6일 수요예배
오인권
2025-0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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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8.(수)
참으로 숨이 꼴닦 넘어갈 것 같은 폭염과 가믐에 단비를 주셔서 잠시 우리의 갈한 숨을 고르게 해주시고 애타는 농심들의 한숨을 멈추게 해주시니 얼마나 감사한지요! 이런 일들을 통해 다시한 번 하나님은 절대로 우리의 애타는 심정을 외면하지 않으시는 분이심에 감사하게 됩니다. 모든 하임의 가족들이 주 안에서 평안하실 것을 믿으며 수요 예배순서 올립니다.
* 묵상: 야곱의 집아 이스라엘이라 불리는 사람들아 유다의 혈통아 이것을 잘 들으라 너는 여호와의 이름으로 맹세하고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부르고 있지만 진실과 공의로 하지는 않는다. 그들은 스스로를 거룩한 성읍의 시민이라고 부르면서 그 이름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께 의지한다고 말하는구나.
네가 얼마나 고집스러운지 나는 알고 있다. 네 목의 힘줄은 철심 같았고 네 이마는 청동 같았다. 아멘 ( 이사야 48:1~2, 4 )
* 기원: 철심 같고 청동같은 고집불통인 우리를 사랑하시므로 외아들을 보내주시고 그의 피흘리신 죽으심과 부활로 우리에게 구원과 영생을 허락하신 하나님 감사드립니다.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맹세하고 스스로 거룩한 성읍의 시민이라 부르면서 여호와 하나님을 의지한다고 하면서도 우리의 고집만을 일삼는 어리석은 죄와 부끄러움을 고백합니다. 이시간 우리의 영을 정결하게 하시고 하나님께 거룩한 예배로 나아가게 하여 주옵소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 신앙고백(사도신경)
* 찬송: 370장 ( 주 안에 있는 나에게 )
* 기도: 김정림집사
* 성경: 창47:1~10 ( 네 나이가 몇이냐? )
잠시 기도하겠습니다.
지난 삼일동안도 세상 가운데서 보호하시고 지켜주신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이 저녁도 저희가 붙들어 주신 은혜 안에서 아버지께 예배하기 원하오니 성령으로 도우시고 홀로 영광 받으시옵소서 또한 부족한 종에게 말씀을 맡기셨사오니 제 입의 말씀을 책임져 주시고 말씀을 전하고 들을 때 은혜 주셔서 감화감동하여 주시므로 믿음으로 반응하며 충만하게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오늘 본문은 요셉의 형들과 아버지 야곱이 바로를 만나게 됨을 통해 야곱의 가족이 애굽의 바로왕의 공식적인 승인을 얻어 애굽 땅 고센에 거주하게 되는 장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늘은 네 나이가 얼마냐? 라는 제목으로 함께 은혜를 나눴으면 합니다.
요셉의 주선으로 바로가 요셉의 형제들과 아버지 야곱을 만나게 됩니다.
형제들에게는 직업을 묻고 야곱에게는 네 나이가 얼마냐고 묻습니다.
네 나이가 얼마냐? 라는 이 말은 진짜 나이보다는 어떻게 살았느냐고 묻는 것입니다.
9절에 보면 야곱의 대답이 나오는데 ‘내 나그네 길’의 세월이 130년입니다.
우리 조상의 나그네 길에 연조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험악한 세월을 보냈습니다. 라고 말합니다. 저와 여러분이었다면 뭐라고 대답했을까요?
아무리 왕이라 할지라도 처음 보는 남의 나라 왕인데 그 앞에서 야곱과 같이있는 그대로의 대답을 하기가 쉽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비록 내 나라를 떠나 타국에 의지하러 갔을지라도 자신의 삶을 숨기고 싶고 마지막 남은 알량한 자존심이라도 세우고 싶었을 것입니다.
야곱의 이런 대답은 자신의 일생에 대한 비관적인 폄하라기 보다는 험악한 130년의 세월이 만들어준 거짓없는 겸손이 아닐까 싶습니다.
험악한 세월이라는 말은 깨뜨리다, 악하다, 심하다 라는 뜻으로 감당할 수 없을 만큼의 심한 고난과 역경을 의미합니다. 야곱의 나그네 길의 세월은 일찍이 조부 아브라함 때부터 가나안 땅을 약속받았으나 정작 소유하지는 못하고 정처없이 오랫동안 방황했던 나날들입니다.
험악한 세월은 여기에 해당하는 관주를 보면
욥14:1절에는 여자가 낳은 사람은 사는 날이 얼마되지 않고 고난으로 가득하다 라고 기록했습니다. 욥은 자신의 경험을 일반화하여 아주 비관적이고 허무주의적인 인생관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욥의 견해는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욥은 인간의 유약성과 허망함을 세상에 태어나면서부터 가지고 있는 보편적인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러나 오직 한 분 예수님께서는 여자의 후손으로서 모든 어둠과 억압의 세력을 물리치시고 당신을 따르는 모든 이들에게 동일한 승리를 보장하셨습니다.
시39:4~ 절에서 다윗은 내 인생이 얼마나 덧없는지 알려주소서 라고 했고 5절에서 주께서 내 삶을 한 뼘만큼 짧게 하셨고 내 일생이 주가 보시기에 아무것도 아니니 제아무리 높은 자리에 있어도 사람이란 헛될뿐입니다. 라고 했습니다. 시39편은 다윗이 임종에 임박하여서 인생의 연약함과 이 땅에서 노력한 일들의 무상함을 뼈저리게 통감하면서 오로지 하나님 앞에 돌아와 삶을 정리하는 자세로 죄의 용서와 구원을 노래한 시로 오직 하나님을 향하여 회개와 구원을 바라고 있습니다.
약4:14절에서 야고보 사도는 ‘인생은 잠간있다가 사라지는 안개’라고 했습니다.
안개라는 말은 자기의 지혜만을 의지하는 인생의 짧고 허무하고 불안한 상태를 비유한 말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인생에게 허락된 삶의 유한성과 허무함을 느끼는 동시에 하나님 안에서 사는 생애야말로 인생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는 유일한 길임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인간으로서의 절망과 한계를 통절하게 느껴야 함을 알 수 있습니다. 인간의 연약함과 허무, 불의 등을 철저하게 깨달아야 그리스도 예수께로 두 손 들고 나오게 된다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빌4:1에서 ‘주 안에 서라’ 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주 안에 서는 것은 1) 군인이 초소를 굳게 지키는 것과 같이
2)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고 했습니다.
성경의 인물들 중에 참으로 드라마 같은 삶을 살았던 인물을 들어보면 야곱을 꼽을 수 있을 것입니다. 야곱은 오늘 본문에서 스스로 험악한 세월을 살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형의 장자권을 팥죽 한 그릇으로 가로채고 복수하려는 형을 피해 도망치듯 집을 떠났고, 외삼촌과의 갈등과, 신부를 얻기 위한 지참금을 노동으로 대신해야 했고, 삼촌뿐 아니라 자기 자녀에게까지 속아 인생의 말년에는 낯선 곳에서 타향살이까지 했던 나그네 인생이었습니다.
뿐만아니라 사랑했던 아내 라헬과의 사별, 딸 디나의 봉변, 세겜 살육사건, 가장 사랑했던 아들 요셉과의 이별 등 고통과 눈물로 얼룩진 많은 악한 날들을 살았습니다.
험악했던 야곱의 삶을 통해 두 가지 측면의 고난의 이유를 보게 됩니다.
첫 번째: 섭리적 고난입니다.
찰스 코우만 여사라는 사람은 1년 동안 애벌레가 나방이 되어 나오는 것을 관찰하다가 작은 구멍으로 큰 몸집이 빠져나오려고 오래 몸부림치는 모습을 보고 안타까워서 그만 가위로 구멍을 좀 크게 넓혀주었답니다. 그랬더니 나방이 쉽게 고치를 빠져나왔습니다. 그러나 얼마 안가서 자기가 엄청난 잘못을 했다는 것을 깨달았답니다.
큰 구멍으로 쉽게 빠져나온 나방은 날개를 질질 끌고 방구석을 기어 다니면서 날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작은 구멍으로 빠져 나오는 그 고통이 사실은 나방에게는 날 수 있는 힘을 기르는 것이었다는 것을 몰랐던 것입니다.
아이들도 자연분만을 통해 어머니의 진통을 겪고 나온 아이들이 그만큼 더 튼튼하게 자란다고 합니다. 고난의 순간이 하나님의 은혜의 순간입니다.
사도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강한 빛 가운데 임하신 예수님을 만난 후 여러 가지 질병에 시달리며 살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 질병을 낫게 해달라고 기도할 때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는 응답을 주셨습니다. 그러자 사도 바울은 자기 고난의 해석과 이해를 바꾸었습니다. 그리고 오히려 “나의 약함을 자랑한다고” 했습니다.(고후 12:9)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와 복을 받으면 고난 끝 행복 시작으로 생각하고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함은 잊고 있습니다. 우리들의 각자 나이가 얼마이든 저와 여러분들이 살아온 세월은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베를 짤 때 보면 씨줄과 날줄이 교차되어 있습니다. 인생들이 당하는 고난은 모두 섭리적 고난이라고 말할 수 없고 반대로 모두 자초한 고난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이는 묘하게 뒤엉켜 있기 때문입니다. 어쨌든 이렇게 뒤엉킨 가운데 우리 각자는 하나님의 나라와 구원 역사를 향하여 일생의 항해를 계속해 나가고 있습니다.
두 번째: 자기가 자초한 고난입니다.
야곱이 자기 생애를 ‘험악했다고 표현 한 것은 실제로 야곱의 삶이 어려움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그는 어머니 뱃속에서부터 누가 먼저 나가느냐로 싸웠습니다. 그는 아버지 사랑을 제대로 받지 못하고 형 에서에게 빼앗겼습니다. 그래서인지 아버지를 속이고 형 에서가 받아야 할 복을 가로챘습니다. 그런데 형 에서가 죽이려 하자 집을 떠나 삼촌 라반의 집으로 도망을 가게 됩니다.
그리고 얼굴이 예쁜 라헬을 아내로 얻으려고 14년 동안이나 머슴살이를 하면서 간교한 장인으로 인해 품삯을 10번이나 속임 당했습니다.
야곱의 생애가 험악했던 이유는 사실 자신 때문이었습니다.
세겜 땅에서 고생을 한 것도 하나님께 벧엘에서 ’내가 다시 돌아오면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겠다‘고 약속을 해눟고 까맣게 잊어버리고 세겜 땅이 좋다고 머물렀기 때문에 딸 디나에게 불상사가 있었고 그 일로 일어난 보복 살육으로 인해 세겜 족속으로부터 죽임을 당할 위협을 자초했습니다.
요셉을 잃어버리고 마음고생을 했던 것도 요셉을 편애했기 때문입니다.
야곱이 이렇게 살았던 이유는 야곱에게 하나님의 은혜 안에 있다는 확신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야곱은 하나님의 말할 수 없는 사랑을 받았습니다. 그런데도 야곱은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에 대하여 마음으로 반응하지 못했습니다.
그는 언제나 조급했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복을 잃어버릴까봐 걱정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소유하지 못할까봐 안달했습니다.
그는 항상 부족했고, 억울했고, 두려웠고, 염려하며 살았습니다. 한마디로 야곱의 생애는 믿음이 없어서 스스로 괴롭히는 삶이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야곱의 일생은 험악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130년을 살아나온 야곱은 일생을 ”험악한 삶“이라고 고백했지만 하나님은 한 번도 야곱을 놓인적이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야곱은 그것을 몰랐습니다. 하나님은 야곱의 일생동안 언제나 모든 일에 간섭하시고 도와주시고 보호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되 당신의 독생자를 주시기까지 사랑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저와 여러분을 위해 십자가에서 대속의 피를 흘리시고 죽으셨습니다.
이제는 하나님이 우리 아버지가 되십니다. 이 세상에서 이렇게 살수도 있고 저렇게 살수도 있지만 궁극적으로 우리는 천국에 가게 되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믿음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부르심에 합당하게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이렇게 험악한 인생을 살던 야곱에게도 보석처럼 빛나는 순간이 있었습니다.
바로 야곱이 “라헬을 사랑하여 그녀를 위해 칠 년 동안 라반을 섬겼습니다.
그런데도 라헬을 사랑했기 때문에 칠 년을 몇일 같이 여겼다고 (창29:20)절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7년 후에는 약속이 실현될 것을 믿으며 고난 속에서 기다림으로 빚어낸 시간이 ‘사랑’의 결실을 맺었습니다.
혹자는 사랑은 고난을 뚫고 나아가게 하는 하나님의 성품을 담은 도구라고 말합니다. 야곱의 거친 인생에서 ‘사랑’이란 단어를 빼버리면 그의 인생을 설명하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사랑하다는 히브리어 ‘아하브’인데 창세기에서만 14번이 사용됩니다. 그 중에 야곱과 관련해서 쓰인 것이 12번이나 됩니다. 야곱은 아버지가 좋아하는 별미를 만들어 축복을 받았고, 레아보다 라헬을 더 사랑했으며, 그의 아들들 중에서 ‘요셉’을 더 사랑했습니다.
한마디로 야곱의 인생은 험악했지만 사랑으로 충만한 인생입니다. 그토록 갈망했던 바를 이루기 위해 견뎌야 했던 고난을 피하기 보다 오히려 열정적으로 수용하고 문제를 정면 돌파해 나가는 힘이 사랑 안에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도 믿음, 소망, 사랑 중 사랑이 제일이라고 말합니다. 사랑이 믿음과 소망보다 우월한 가치라서가 아니라 사랑 안에 믿음과 소망의 요소를 담아내야 비로소 사랑이 완성되기 때문입니다. 누군가를 끝까지 믿고 기다려 줄 때 그 사랑에 진정성이 있다고 말합니다.
야곱의 사랑은 믿고 기다리면서 증명되었습니다. 먼저 살펴볼 요소는 믿음입니다. 그의 믿음은 사람의 말에 대한 믿음보다 깊은 것이었습니다. 도망자 신세로 광야에서 노숙하던 시간에 시작된 믿음입니다. 가장 외롭고 춥고 무엇보다 불확실한 미래로 무척이나 힘든 시간에 벧엘의 하나님이 찾아오셨습니다.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창28:15)“ 약속해 주셨습니다.
창31:42절을 보면 ”제 아버지의 하나님, 아브라함의 하나님, 곧 이삭이 경외하는 분께서 저와 함께하지 않으셨다면 외삼촌께서는 분명히 저를 빈손으로 보내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제가 고난당한 것과 제가 수고한 것을 보시고 어젯밤에 외삼촌을 꾸짖으신 것입니다. 이 구절을 보면 그가 비록 나의 하나님을 확실히 고백하지 못하고 있으나 벧엘의 하나님의 약속을 끝까지 붙들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창48:16절에서 야곱이 손자들을 위해 기도하며 ‘나를 모든 환난에서 건지신 여호와를 고백하며 아이들에게 복을 달라고 기도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이름과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의 이름이 아이들을 통해 불려지기를 기도하고 아이들이 땅에서 크게 번성하기를 축복하고 있습니다.
야곱의 사랑은 기다림 속에서 만들어진 결정체입니다. 흑연이 땅 밑에서 오랜 힘과 열을 견디어 낸 뒤에 다이아몬드가 되듯이 성도의 기다림은 소망의 인내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꿈과 소망을 시간 속에서 엮어낸 아름다움입니다.
지금도 하나님은 야곱처럼 나그네 인생길을 걷고 있는 형제자매들에게 동일한 약속을 주십니다. “손을 펴서 모든 생물의 소원을 만족하게 하시나이다 여호와께서는 그 모든 행위에 의로우시며 그 모든 일에 은혜로우시도다. 여호와께서는 자기에게 간구하는 모든 자 곧 진실하게 간구하는 모든 자에게 가까이 하시는도다.(시145:16)”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꿈을 이루고 기뻐할 때 하나님도 기뻐하십니다. 우리가 꿈을 이루지 못하고 좌절할 때 하나님도 아파하십니다. 자녀들이 원하는 것을 얻게 되기를 바라는 것이 하나님의 본의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자주 경험하는 현실은 기다림의 시간이 더 많다는 것입니다.
기다림의 시간이 필요한 이유는 우리가 그 꿈을 다룰 능력을 갖추길 바라시기 때문입니다. 꿈이 우리의 손에 잡히기까지 먼저 해야 할 일은 우리가 하나님의 손에 의해 훈련을 받는 것입니다.
앞에 있는 것을 얻기 위해 달리기를 포기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이 우리에게 허락하신 것을 지금 얻지 못했다고 그 전에 내려놓지 마십시오. 마침내 주님은 우리에게 허락하신 것을 반드시 이루실 것입니다. 그리고 언젠가 우리 앞에 이런 명패가 놓였으면 좋겠습니다. 험악한 인생을 살았을지라도 사랑으로 충만한 인생을 살았더라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지금은 비록 세상의 권세 아래 있는 신분이지만 심하게 깨어지는 악한 세상 속에서 야곱과 같이 험악한 고난의 시간을 살아갈지라도 우리는 ‘왕 같은 제사장으로서 세상 권세자들 보다 높은 신분에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충만한 인생을 이루기까지 우리의 달려갈 길을 멈추지 마시기 바랍니다. 저와 여러분은 모두 같은날 같은 시간이 아니지만 하나님 앞에 서게 될 것입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각자에게 물으실 것입니다. 네 나이가 얼마냐? 너는 어떻게 살았느냐?
군인들이 초소를 굳게 지키는 것같이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하게 살다가 하나님께서 물으실 때 내 나그네 인생의 길이 얼마 안되지만 험악한 인생을 살았습니다. 라고 진지하고 겸손하고 솔직한 대답을 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였음을 고백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하나님과 사람들에게 사랑으로 충만한 인생을 살았더라는 인정을 받을 수 있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 찬송: 375장 ( 나는 갈 길 모르니 )
* 주기도: 예배를 마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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