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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7월 23일 수요예배
운영자 2025-07-23 추천 0 댓글 0 조회 31

20250723 “수요 예배 순서”를 올립니다.


1.묵상: 시 27:1-6
여호와는 내 빛이시요, 내 구원이시니 내가 무엇을 두려워하겠습니까? 여호와는 내 삶의 힘이시니 내가 누구를 무서워하겠습니까?
악한 사람들이, 내 원수들이, 내 적들이 내 살을 뜯어먹으려고 덮칠 때 그들은 걸려 넘어질 것입니다.
군대가 나를 향해 진을 쳐도 내 마음은 두렵지 않을 것입니다. 내게 대항하는 전쟁이 일어나더라도 내가 오히려 담대할 것입니다.
한 가지 내가 여호와께 바라는 것이 있으니 내가 찾는 것은 이것입니다. 내가 평생 여호와의 집에 있어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바라보고 주의 성전에서 여쭙는 것입니다.
고통스러운 날에 주께서 나를 그 장막에서 숨겨 주실 것이요, 그 천막의 은밀한 곳에 나를 숨겨 주실 것입니다. 나를 바위 위에 높이 세워 주실 것입니다.
그때 내 머리가 나를 둘러싸고 있는 적들 위에 높이 들려 올려질 것입니다. 그러면 내가 주의 장막에서 기쁘게 제사를 드리고 여호와께 노래하고 찬양할 것입니다.

2.기원

3.신앙 고백

4.찬양: 150장 “갈보리 산 위에”

5.기도 인도: 김 선미 권사

6.성경 봉독: 사도행전 11장 1-12절

7.말씀 선포: “편견(偏見)을 넘어 오직 믿음으로”

(편견이 가져온 끔찍한 결과)
2018년 1월 20일 NHK에서 긴급 속보가 발표되었습니다.
Tokyo 야스쿠니 신사에 휘발류 통을 들고 나타났던 방화미수범이 체포되었다는 긴급 속보 뉴스가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하였습니다.
사카구치 마유미라는 범인은 25세의 여성으로 토교대 대학원생이었으며, 일본 혐한 극우단체 최연소 간부였다는 것입니다. 그녀는 체포당시 “저는 8개월 전까지 매주 이곳에서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아닙니다. 저는 이 신사를 불태우려 합니다.”라고 외쳤다고 합니다.

마유미의 증조부는 대동아 전쟁의 영웅이었고, 그녀의 조부는 전후 일본 재건의 주역이었으며, 아버지는 외부성의 고위 간부였습니다. 그녀는 어릴적부터 일본의 위대함과 한국의 혐한에 대해 끊임없는 편견된 교육을 받아 왔음.
조부가 유언장과 50억 엔의 상속 유산을 남김. 유언장에는 “마유미, 네가 꼭 한국에 가 보고 경복궁, 서대문 형무소, 독립기념관을 꼭 방문하고, 그 방문기를 변호사에게 제출 조건으로 상속이 이루진다.
그녀는 열등한 한국을 파헤치고자 한국 방문함. 발전된 한국의 보습을 발견하였으나 이런건 다 보여주기를 위한 한국의 show 라고 단정함. 독립기념관을 방문시 ‘일제침략관’에서 친일파 명단과 사진을 접함. 친일파 이름과 사진 중에 최서혁 이라는 사람이 자신의 증조부와 같다는 사실을 알게 되어 대학도서관에 가서 최서혁이라는 인물을 알아보기 시작함.
최서혁은 조선 총독부 경무실 형사로 독립 운동가들을 수사담당자였음.
최서혁은 해방이 되자 약탈재산, 일본정부로부터 받은 포상금을 가지고 일본으로 도주하여 사카구치 타로라는 이름으로 개며와여 일본 패망 혼란기에 공무원에 뇌물을 주고 가짜 족보를 만들어 일본인으로 세탁하여 대동아 전쟁의 영웅으로 신분세탁한 가짜 일본인 행세를 했던 사실을 확인힘. 편견의 폐해를 보여줌.

오늘은 사도행전 11장 1-12절의 하나님의 말씀을 본문으로, 주님이 주시는 은혜 Series #4, “편견(偏見)을 넘어 오직 믿음으로” 라는 제목으로 말씀의 은혜를 나누시기를 원합니다.

편견(偏見=Prejudice), 先入見=Preconception).
치우칠 편, 볼 견=공정하지 못하고 한쪽으로 치우친 생각

오늘 본문에서, 한 사람이 비난을 당하고, 욕을 먹는 사람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누구입니까? 베드로(Peter)입니다.

본문 2절에서, 베드로가 예루살렘에 올라 왔을 때에 할례자들이 베드로를 비난합니다.
여기 할례자들이란 개종한 유대 기독교인들을 말합니다.

여기서 마지막 단어 “비난하여”라는 ‘디아크노아’라는 단어는 “문제 제기를 넘어 집요하게 따졌다”는 뜻입니다.

성도님 여러분, 할례자들이 왜 베드로를 비난했을까요? 이유가 있습니다.
“베드로가 무할례자의 집에 들어가서 그들과 함께 먹었다”는 이유입니다.
즉, 베드로가 하나님을 안 믿는 사람의 집에 들어가서 그들과 함께 밥을 먹었다는 것입니다.
이 말을 지금 우리로서는 이해하기 힘듭니다.
하지만 그 당시의 유대인들과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을 안 믿는 사람들과는 상종(相從)을 안 했기 때문에 이해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들 집에 들어가지도 않았고, 그들과는 밥상에 함께 앉지도 않았습니다. 할례받은 유대인들이 그들과 함께하는 것을 부정(不貞)한 것이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참으로 지나친 편견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베드로가 하나님을 안 믿는 사람과 만난 것은 고사하고 집에 들어가서 밥까지 먹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난리가 난 것입니다.

여러분, 이 문제가 어떻게 해결됐을까요?
본문 4-11절까지 베드로는 할례자들에게 이 일의 자초지종(自初至終)을 차근 차근 설명하였다고 기록합니다. 즉, 화내지 않고, 흥분하지 않고, 차근차근 매우 권위 있게 설명했다는 말씀입니다.

베드로의 설명은 자기가 얼마 전 체험한 체험입니다.
베드로가 얼마 전 욥바(Joppa)성에서 기도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환상(비몽가몽간에)중에 하늘에서 큰 보자기 같은 그릇이 네 귀에 달려 내려옵니다.(5)
보니 그 속에는 네발 가진 것, 들짐승, 기는 것, 공중에 나는 것들이 있었습니다.(6)
이것들은 다 유대인들이 부정하게 여기는 것들로 절대로 먹지 않는 것들이었답니다. 그래서 망설이고 있었습니다.

그 때 하늘에서 소리가 들립니다.(7)
“베드로야 일어나 잡아먹으라.”
베드로는 “말도 안됩니다.” (8)
“주님 그럴 수 없습니다. 부정하거나 깨끗하지 않은 것은 결코 내 입에 들어간 적이 없습니다.“(8)

그런데, 하늘에서 다시 소리가 들립니다.
“하나님께서 깨끗하게 하신 것을 네가 불결하다고 하지 말라”(9)

이런 일이 3번씩이나 반복이 됩니다.(10)
베드로가 고민에 빠집니다.
이게 뭐지? 이게 무슨 의미지?

그 때, 문 밖에서 사람들의 소리가 들립니다.
가이사라(Caesarea=욥바와 두로사이에 위치한 도시로 로마군 사령부가 있었음)에서 로마 백부장 고넬료(Cornelius)가 베드로를 초청하려고 보낸 세 사람이 베드로를 찾아 온 것입니다.(11)

그때까지도 베드로는 ‘아니 하나님도 안 믿는 사람들이 왜 나를 불러?’라고 생각했습니다.
이 때, 성령님의 음성이 들려 왔습니다.
“주저하지 말고 함께 가라”는 말씀을 듣고 그의 편견(偏見)을 깨부수고 성령님의 말씀에 순종하게 되었다고 설명하는 내용입니다.(12)

베드로는 성령께서 가라고 하는데 어떻게 거절을 합니까?
고넬료의 집으로 갑니다.

베드로를 만난 고넬료가 말합니다.
“내가 당신을 청한 것은 천사가 우리 집에 와서 내게 명한 것이라는 것입니다”(13)
“또 베드로가 오면 온 집이 구원 받을 말씀을 네게 이를 것이라” 고 말씀했다는 것입니다.(14)

베드로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후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베드로가 설교를 하자 성령이 고넬료 집 사람들에게 임(臨)하였습니다.
오순절 마가 요한의 다락방에 임한 것 같은 성령이 그들 모두에게 임(臨)하였습니다.

베드로는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는 모습을 보고는 말합니다.
“내가 누구이기에 하나님을 능히 막겠느냐?”
그들과 함께 침식을 하며 며칠 동안을 지냈습니다.

성도님 여러분, 이 무슨 말씀입니까?
“내가 무 할례자의 집에 들어가서 먹고 마신 것은 다 하나님께서 명하신 일이라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편견을 넘어 성령님의 말씀에 좇은 결과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졌다고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무할례자들이 우리의 적(敵)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들도 속해 주셨고, 그들도 깨끗하게 해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들에게도 은혜를 주셨고, 그들에게도 성령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들도 하나님의 자녀들이요, 우리의 가족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유대인만 사랑하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이방인도 사랑하시는 하나님이라는 설명입니다.

성도님 여러분,
이 말씀을 들은 할례자들은 어떻게 했을까요?
오늘 (18)을 보면,
그들(할례자들)은 이 말을 듣고 더 이상 할 말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찬양하며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이방 사람들에게도 생명 얻는 회개를 허락하신 것이로군요”라고 말했습니다.

베드로를 심각하게 비난하던 할례자들이 베드로 비난을 멈추고 오히려 잠잠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는 기록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방인에게도 생명 얻는 회개의 기회를 주셨다고 고백을 하였습니다. 놀라운 반전입니다. 드디어 인간관계의 막힌 담의 경계를 허물고 이방인들을 가족으로, 동료로 받아들인 것입니다.

성도님 여러분!
이 사건은 당시 초대 교회에 아주 중요한 사건입니다.
왜 그럴까요?
이 사건 이후!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의 반목(反目)과 질시(嫉視)의 경계가 허물어졌기 때문입니다.
이 사건 이전에는 늘 유대인과 기독교인으로 나누어져 충돌하여 비난하였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과 하나님을 안 믿는 사람으로 나누어져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 사건 이후에 둘은 하나가 됩니다. 유대인과 기독교인들이 하나가 됩니다.
하나님을 믿는 자와 안 믿는 자가 하나가 됩니다. 편견을 넘어 믿음의 형제들, 믿음의 자매들로 하나가 되었습니다.

그 뿐만이 아닙니다.
더 발전하여 부자와 가난한 자가 하나가 됩니다.
남자와 여자가 하나가 됩니다.

예전에는 출신, 고향, 종교, 성별, 민족에 따라 다 나누어져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그 모든 경계를 넘어섰습니다.

그가 누구든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따지지 않았습니다.
다 품어 주고, 다 받아주었습니다.
경계의 담이 무너진 것입니다.

그결과
초대교회는 다양한 사람들이 모이는 교회가 됩니다.
더 폭발적으로 성장하는 교회가 되고, 세계만방에 복음을 전하는 교회로 변모됩니다.

건강한 교회는 다른 교회가 아닙니다.
이처럼 경계를 허물고 다 품어 주는 교회입니다.

요즘 대도시의 어떤 교회들이 이상한 교회가 되어가고 있다고 합니다.

의사만 모이는 교회!
교수만 모이는 교회!
사업가와 부자만 모이는 교회! 등등.

아예, 대 놓고 선을 긋고 있는 교회들이 되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자격이 아닌 사람들은 교회에 들어오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반 성경적입니까 !
그런 방식이 교회 성장의 한 방법이라고까지 주장하는 자도 있습니다.
소위 '동질(同質)단위의 원칙'이라고...?
“같은 부류의 사람들을 중심으로 전도하고 모일 때 교회는 효과적으로 성장한다”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런 교회는 이미 교회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이른바 “그들만의 세상이 되고 있습니다. 오직 그들만의 끼리끼리 교제 Leage일 뿐입니다.

예수님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결단코 동질 단위의 원칙으로 살지 않았습니다.
도리어 예수님은 동질 단위를 허무셨습니다. 끼리끼리를 배척하셨습니다.
가난한 자, 병든 자, 눈먼 자, 죄인들! 이들을 품어 줍니다.

나는 이들의 친구요,
나는 이들을 위하여 왔다고 말씀을 하십니다.

심지어, (막3:32-35)을 보면 예수님은 어머니와 동생들이 예수님을 찾아왔을 때, 자기 주위에 둘러앉은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씀합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라”!

이게 무슨 말씀입니까?
예수님은 가족이라고 하는 동질 단위도 허문 것입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자는 다 내 가족이 될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당시의 권력있고, 돈 있는 부자들이 예수님의 이런 보습을 보고는 못 견딘 것입니다. 마침내 예수님을 죽이기까지 한 것입니다. 편견이 나은 씻을 수 없는 범죄를 저질르고 만 것입니다.

세상을 보십시오
세상도 지금 경계를 허물고 있습니다.

요즘 논란이 되고 있는 차별금지법(差別禁止法)은 비록 지금 기독교는 몇 가지 독소조항 때문에 반대를 하고 있지만, 이 법이 나쁜 법만은 아닙니다. 사람을 차별하지 말자는 취지의 법입니다.
*미국의 예를 보면 1992년 John F. Kennedy 대통령 당시 차별금지라는 명목으로 주기도문, 신앙고백, 성경비치는 물론 설교까지도 공공기관, 공립학교내에서 하지 못하도록 헌법에 명시하였습니다. 그후 33년 동안 미국이 청교도들이 세운 나라 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기독교 국가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최근에 Texas 주에서 33년 동안 금지 되었던 이 헌법을 개정하는 운동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 개정안이 확정되면 금년 9월 1일부터 시행된다고 합니다.

그 뿐만이 아닙니다.
지금 우리나라는 이제는 단일민족(單一民族)이란 단어를 쓰지 않습니다.
물론 유엔이 쓰지 말라고 권고를 했지만, 우리나라는 이제 실제로 단일 민족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다민족국가(多民族國家)로 변모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우리 주변에 있는 외국인들은 외국인이 아닌 우리 민족이니 차별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세상이 경계를 허물고 있습니다.

그가 누구든 교회에 등록을 하는 순간! 아니 등록하지 않더라도 우리와 함께 예배를 드리는 순간! 그와 우리의 경계는 다 허물어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가족이 되고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그의 잘됨이 나의 잘됨이 되고, 그의 아픔이 나의 아픔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함께 하나님의 나라를 세워 갈 동역자가 되는 것입니다.

(갈3:28)을 보면 사도 바울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자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라“고 말씀합니다.

2000 여년 전에 이런 말씀을 할 수 있는 것은 가이 사회혁명(社會革命)이라고 말랄 수 있습니다. 기독교의 진리가 아니면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교회에서 함께 예배를 드리는 순간!
우리는 하나의 운명 공동체가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서로 다른 존재들이 아니라 하나요, 한 가족이라는 것입니다.

초대 교회를 보십시오.
행 15장을 보시면 초대 교회는 예수를 믿게 된 이방인들에게 호의를 베풀어 줍니다.
할례를 받게 하고, 율법을 지키게 하자는 말에 우상의 더러운 것과 음행과 목매어 죽인 것과 피만 멀리하게 하자고 합니다.

이것이 무슨 말입니까?
경계를 허무는 것입니다. 쉽게 믿을 수 있도록 도와준 것입니다.
이래서 초대교회가 강한 교회가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선을 긋는 것, 못 넘어 오게 하는 것, 이것은 성경적이 아닙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우리 스스로 깨트리는 것입니다.
그것이 서로 사랑하고, 서로 세워주는 것입니다

(문전박대 당한 간디)
인도의 영원한 지도자 마하트마 간디(1869-1948)가 젊었을 때 영국으로 유학을 갔습니다. 온갖 차별과 편견과 냉대에 시달리면서 어려운 유학생활을 하였습니다. 그러다가 우연히 성경책을 발견하고 이를 읽기 시작하였습니다. 성경을 읽으면서 간디는 참으로 많은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특히 예수님이 산상수훈의 말씀은 그에게 큰 감명을 더하여 주었습니다.

성경을 읽은 간디는 ”하나님을 위해 그의 일생을 바쳐야겠다“는 결심을 하고는 교회의 문을 두드리게 되었습니다. 그 당시에는 인도가 영국의 식민지에 지나지 않는 미개(未開)한 나라이었고 인종차별이 심한 때이었기 때문에 그의 결심은 빛을 볼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교회를 찾아다니며 예수를 잘 믿을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여러 차례 청원을 해 보았으나 교회당에 들어가지도 못하고 쫒겨나기가 일쑤이었기 때문입니다. 교회에서 쫓겨 나면서 한 그의 마지막 말은 너무나 유명합니다.

“나는 그리스도는 존경하지만 그리스도인은 경멸한다.”
그는 결국 기독교에 대한 신앙을 버리고 교회를 떠나고 말았습니다. 인도로 돌아온 그는 10억 인구의 인도를 움직이는 위대한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만약 그 때 교회가 간디의 간절한 소망을 외면하지 않았다면 인도의 역사는 전혀 달라졌을지 모릅니다. 간디가 기독교의 영향을 인도에 끼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인도 컬컷트에서 만나는 인간 이하의 삶을 사는 그 수많은 거지떼들은 인도가 아직도 어두움 속에 헤매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제 말씀을 맺습니다.
왜 편견이 생깁니까? 과거의 나쁜 기억을 잊지 못해 생기는 초기 정신병적 질환이 바로 편견입니다. 사람의 영혼에 가장 나쁜 것은 과거의 나쁜 기억이 현재의 나를 지배하도록 방치하는 것입니다. 과거의 불행을 쉽게 잊을 줄 아는 거룩한 건망증은 행복의 제일 요소입니다. 과거의 불행을 잊을 때 현재의 행복이 있습니다. 편견은 비겁한 사람의 무기입니다. 겉만 보고 편견을 가진 사람에게 있는 특징 한 가지는 상대방이 외적으로 그럴듯하면 그 앞에서는 맥을 못 추는 것입니다.

강자에게는 한없이 비굴하고, 약자에게는 한없는 높아지는 마음이 편벽한 사람의 마음입니다. 편벽한 사람은 남을 무시도 잘하지만 남 앞에서 기도 잘 죽습니다. 편견의 뿌리는 교만입니다. 남보다 높아지고 싶은데 특별히 내세울 것이 없는 사람이 성별, 인종, 직업, 출신지 등을 언급하며 남을 낮추고 나를 낫게 보이려고 몸부림치는 것이 편견이고, 자기 인격이 더 못됐으면서 남의 인격을 못됐다고 하는 것이 편견입니다.

편견은 한 부분만 보고 판단하기에 진리를 가장 왜곡할 수 있습니다. 편견은 가장 가벼운 죄처럼 보이는 가장 무거운 죄이고, 인간 영혼이 제거해야 할 제일 대상입니다. 편견의 벽을 무너뜨릴 때 불행의 벽도 무너뜨릴 수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 사람들도 예수님을 향해 “이 사람이 마리아의 아들 목수가 아니냐?”고 직업에 대한 편견을 가졌고,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고 출신지에 대한 편견을 가졌습니다.

예수님이 지역적으로, 그리고 직업적으로 편견의 대상이 되는 출신으로 사셨고, 십자가에 못 박히신 후에 그 못 박힌 손 그대로 부활하심으로 영원히 장애인이 되신 것은 “편견을 버리라!”는 강력한 메시지입니다. 참된 믿음은 잘못된 편견을 깨뜨릴 줄 알 때 주어집니다. ‘나 중심’의 사고체계는 차이를 차별로 떨어뜨리지만, ‘우리 중심’의 사고체계는 차이를 개성으로 승화시킵니다. 졸장부는 ‘다른 것’을 ‘틀린 것’으로 생각하고 금방 편견을 가지지만 대장부는 ‘틀린 것’을 보고도 ‘틀린 사람’이라고 단정하지 않습니다.

약2:9절 말씀입니다.
*"만일 여러분이 겉모습으로 사람을 판단한다면 죄를 짓는 것이며, 율법이 여러분을 범죄자로 판정할 것입니다." (약2:9)

성도님 여러분! 우리가 편견의 경계를 어떻게 허물까요?
*“무식하면 용감하다”는 말이 있듯이 무식하고 교만하면 편견이 자랍니다.
*자신의 경험, 형편, 환경만을 고집하지 이니 합니다.
*주님이 가르쳐 주시는 이웃사랑을 실천합니다.
*주님이 주시는 말씀에 근거하여 신앙생활을 합니다.

* 기도: 공의로 심판하시는 주님, 제 편견을 제거해 주시고 주님의 은혜를 내려주시옵소서. 차별 없이 모든 사람들에게 주님의 사랑을 보여줄 수 있게 도와주시옵소서. Amen !!

8.찬송: 365장 “마음속에 근심 있는 사람”

9.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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