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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7월 16일 수요예배
운영자 2025-07-16 추천 0 댓글 0 조회 16

20250716 “수요 예배 순서” 올립니다.


1.묵상: 시37편 1-6절

악을 행하는 자들 때문에 불평하지 말며 불의를 행하는 자들을 시기하지 말지어다
그들은 풀과 같이 속히 베임을 당할 것이며 푸른 채소 같이 쇠잔할 것임이로다
여호와를 의뢰하고 선을 행하라 땅에 머무는 동안 그의 성실을 먹을 거리로 삼을지어다
또 여호와를 기뻐하라 그가 네 마음의 소원을 네게 이루어 주시리로다
네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그를 의지하면 그가 이루시고
네 의를 빛 같이 나타내시며 네 공의를 정오의 빛 같이 하시리로다

2.기원

3.신앙 고백

4.찬양: 80장 “천지에 있는 이름 중“

5.기도 인도: 최 길환 장로

6.성경 봉독: 이사야 26장 1-7절

7.말씀 선포: ”주님이 주시는 평화“

지난 5월, 스위스 제네바 소재, “국제 방위 연구소에서 열린 긴급 전문가 회의”에서 미국의 저명한 Missile 전문가, Dr. Michle Tomson에 의해 “한국의 극초음속 Missile 방어 System 개발” 소식이 전해져,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하였습니다.

<사 26:1-7> P-1153
(1)그날에 유다 땅에서는 이 노래를 부를 것이다. 우리의 성읍은 튼튼하다. 하나님께서 성벽과 방벽을 겹겹이 세우셔서 우리를 구원하셨다.
(2)성문들을 열라. 신의를 지키는 의로운 나라가 들어오게 하라.
(3)‘주를 한결같은 마음으로 의지하는 사람들에게 주께서 평화를 넘치도록 부어 주십시오. 그가 주님을 신뢰하기 때문입니다.’
(4)영원히 여호와를 신뢰하라. 여호와 그분만이 영원한 바위시기 때문이다.
(5)그분은 거만한 사람들을 낮추시고 높은 성읍을 낮추셨다. 그 성읍을 땅에까지 낮추시는데 땅바닥에 내동댕이치셔서
(6)전에 짓밟혔던 사람들이 그 성읍을 밟고 다닌다. 약하고 가난한 사람들이 발바닥으로 밟고 다닌다.
(7)‘바르게 사는 사람의 길은 곧게 뻗어 있습니다. 주께서 바르게 사는 사람의 길을 평탄하게 하십니다.’

오늘은 본문 이사야서 26장 1-7절의 말씀에 근거하여 주님의 은혜 Series #3, “주님이 주시는 평화”라는 제목으로 말씀의 은혜를 나누기를 원합니다.

1.평화(平和)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평화(平和)'란 말은 누구나 다 사랑하는 말이요 즐겨 쓰는 말 가운데 하나입니다. 특별히 민족이 남북으로 분단되어 전쟁을 하였고, 지금도 서로 대치된 휴전상태에 있는 이 땅에 사는 우리들에게 있어서는 평화는 너무도 절실한 소망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평화가 무엇이냐?”고 물을 때 정확하게 정의(定義)하기란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닙니다. 우리는 그저 막연히 전쟁이 없는 상태를 평화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평화를 깨트리는 것은 전쟁만이 아닙니다. 우리는 휴전 이후 이제까지 전쟁을 하지 않았지만, 독재 정권에 시달리면서 평화를 맛보지 못하였습니다. 평화를 누리지 못하게 한 요인은 외부의 침략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내부에서 솟아난 독소(毒素)도 있었기 때문입니다.

지금 우리는 경제적으로 상당히 향상되어 옛날보다는 훨씬 잘 살고 있습니다만, 가난한 때보다 우리가 더 많은 평화를 가졌다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아직도 절대 가난으로 노숙하는 사람들을 비롯하여 끼니를 걱정해야 하는 사람들이 아직도 많이 있고, 정치가 안정되지 못함으로써, 사회적 불안이 우리를 짓누르고 있기에 우리가 진정한 평화를 누리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결국 이런 사실들을 고려할 때 우리가 평화를 누리지 못하도록 끊임없이 작용하는 악의 세력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에덴동산의 평화를 깨트린 뱀의 간교한 유혹, 이것은 온 인류의 평화를 깨트리고 있는 사탄(Satan)의 계략을 단적으로 상징해 주고 있는 이야기라 하겠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진정한 평화란 사탄의 준동(蠢動)이 그치고 하나님의 원래 창조하신 그 상황으로 돌아갈 때 비로소 이루어질 수 있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결국 평화란 인간의 어떤 노력으로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즉, 평화란 하나님이 역사하시지 않으면 이루어 질 수 없다는 진리를 깨닫게 됩니다. “평화란 결국 하나님의 선물이다” 라고 말할 수밖에는 없습니다.

2.평화는 인간이 하나님과의 관계회복입니다.

히브리어로 평화는 '샬롬(shalom)'입니다. 이 단어의 뜻은 '완전하다''건전하다'는 뜻을 가진 ’샬렘‘이라는 동사에서 파생된 단어입니다. 이 단어의 어근(語根)은 완전과 일치의 상태, 회복된 관계의 상태에 들어가는 것을 뜻합니다. 그래서 구약에서는 '샬롬'이란 말이 여러 가지로 번역이 됩니다. 평화, 번영, 안녕, 건강, 완전, 안전 등으로 번역이 됩니다. 결국 구약에서 '샬롬'이라고 말할 때 그것은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계약 관계를 올바로 지킬 때를 말하는 것입니다. ‘살롬’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과 올바른 계약 관계 속에 있지 않으면 평화를 누릴 수가 없었습니다.

신11장 26-28절의 말씀은
(26)보라, 내가 내가 오늘 너희 앞에 축복과 저주를 두었다.
(27)내가 오늘 너희에게 주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에 너희가 순종하면 복을 받을 것이요.
(28)너희가 너희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하고 오늘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길에서 떠나 너희가 알지 못했던 다른 신들을 섬긴다면 저주를 받을 것이다.

이 말씀(신명기의 주제)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명령을 좇아 바르게 행하면 생존하며 번성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즉 '샬롬'을 얻게 될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계명을 어기고 다른 신을 섬기게 될 때 저주 (詛呪)를 받아 약속의 땅에서 쫓겨난다는 말씀입니다.

이와 같은 신명기의 말씀교훈을 사실로 보여 주는 성경이 사사기입니다. 이스라엘이 범죄 하면 이웃 나라의 침략을 받아 평화를 잃어버리고 고난을 당해야만, 했던 그것입니다. 그들이 고난 중에서 하나님께 회개하고 돌이키면 하나님께서 저들을 구원하여 다시 평화를 누리게 하여 주셨습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 속에 있을 때는 번영하였고 안전하게 보호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샬롬'은 바로 하나님이 내리시는 은총 속에서 안전하고 평안한 삶을 누리는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샬롬'은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 속에서만 누릴 수 있는 것이지 그 외에 인간적인 어떤 수단이나 방법으로는 누릴 수 없는 것입니다.

이사야서 26장 12절에 보면 "(12)여호와여, 주께서 우리에게 평화를 주셨습니다. 우리가 한 일들조차도 모두 주께서 우리를 위해 해 주신 것입니다.
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이 평화를 주시지 아니하면 어디에도 평화는 깃들이지 아니하신다는 말씀입니다.

또 오늘의 본문 이사야서 26장 3절에 보면 "(3)‘주를 한결같은 마음으로 의지하는 사람들에게 주께서 평화를 넘치도록 부어 주십시오. 그가 주님을 신뢰하기 때문입니다.’ 라고 말씀합니다.

주를 의뢰하는 심지(心志)가 견고한 자에게 하나님께서 완전한 평화를 주신다는 믿음을 가르쳐주십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끝까지 올바로 유지하는 자에게 평화를 주실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평화를 지키는 든든한 성은 바로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임을 교훈하고 있습니다.
(시127:1)에서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않으시면 파수꾼이 지키고 서있는 것도 헛일이다."라고 한 말씀도 바로 진정한 평화는 무기를 증강하고 든든한 성을 쌓는데서 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올바로 섬기고 그 계명을 좇아 바르게 사는데 있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구약에 나타난 예언자들은 겉으로 보기에 평화롭고 문제가 없을 때에 나타나 하나님의 심판을 선언하곤 하였습니다. 예언자들은 지금 그들이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지 않으면서 누리고 있는 평화는 거짓 평화이며, 곧 무너질 수밖에 없는 것임을 미리 내다보았던 것입니다. 거짓 예언자들이 '평안하다 평안하다'고 말할 때 예레미야나 에스겔 같은 예언자들은 그것이 거짓 예언임을 지적하고 회개할 것을 촉구하였던 것입니다. 거짓 예언자들은 정치적인 상황 판단을 통해 전쟁의 위험이 없다고 보기 때문에 평화를 선포하지만,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에서만 평화가 가능하다고 본 예레미야 선지자는 지금 하나님을 올바로 섬기지 않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평화가 아닌 재앙이 임박했음을 예언하였던 것입니다.


3. ‘진정한 평화는 메시야가 오실 때 이루신다.’고 예언하였습니다.
예언자들은 이스라엘 백성의 강퍅함을 보면서 저들이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회복하는 일이 거의 불가능한 것으로 보고, 오직 새로 오실 메시야만이 이 관계를 회복시킬 수 있을 것으로 보았던 것입니다. 따라서 진정한 평화는 메시야가 오실 때 이루어질 것이라고 예언하였습니다.

이사야서 9장의 메시야 예언에 보면 흑암의 땅에 빛이 비치고 즐거움이 온 땅에 충만하고 무겁게 메었던 멍에와 압제가 사라지고 모든 전쟁이 끝나는 날이 이를텐데 그것은 평화의 왕이라 불릴 한 아기가 탄생하였기 때문이라고 예언하였습니다. 즉, 메시야를 통해서만 진정한 '샬롬'이 올 것을 예언한 것입니다.

또한 이사야서 11장의 메시야 예언에서도 이새(Jesse)의 줄기에서 한 가지가 날텐데 그는 공의로 다스리는 자가 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때는 맹수와 어린양이 함께 노닐고 어린아이가 독사의 굴에서 장난하여도 해함이 없는 평화의 동산이 이루어질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즉, 메시야가 오시므로 평화는 공의와 더불어 실현될 것이라고 예언한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에서만 '샬롬'이 가능한데 그것은 결국 하나님이 보내신 메시야만 하실 수 있는 일임을 구약성경은 증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4.평화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이시다.
그러므로 메시야로 오신 예수님의 탄생은 바로 하나님의 평화를 선포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이 땅의 평화를 깨트리는 악의 세력이 준동하고 있어 평화의 왕으로 탄생하신 예수님은 이들과 정면으로 충돌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사탄의 세력은 온갖 사람과 갖은 방법을 동원하여 예수님의 평화를 위한 사역을 막으려고 하였습니다. 평화의 왕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은 어쩔 수 없이 평화를 위하여 싸우실 수밖에 없는 투쟁의 삶이 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마10장 34절에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이 땅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지 말라. 나는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
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루시는 평화는 그 옛날 로마가 이룩한 평화 즉 팍스 로마나(Pax Romana=로마의 힘의 평화)나 혹은 오늘날 미국이 전 세계의 경찰 노릇을 하며 이룩하는 평화 즉, 팍스 아메리카나(Pax Americana=미국의 힘의 평화) 같은 평화가 강대국의 전유물이 결코 아님을 뜻합니다.
즉,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강력한 국가를 세우시고 그 국가를 통해 이 세계를 지배하면서 이룩하는 그런 힘에 의한 평화를 주러 오신 분이 결코 아니라는 뜻입니다.


에덴의 타락이후, 인간은 본질적으로 하나님의 뜻을 거슬려 살아왔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바로 하나님을 거스르는 그 죄를 없이하므로써, 우리를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 속에 두시므로 평화를 누리게 하려는 것 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심은 오히려 팍스 아메리카나(미국의 힘에 의한 평화)를 심판하시기 위하여 오신 것이기에 그것은 칼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자신의 죄악을 도려내는 아픔 없이는 진정한 평화란 있을 수가 없습니다. 오늘 이 땅의 왕(정치 지도자)들이 평화를 만든다고 하면서 이룩한 모든 죄악을 심판함 없이 진정한 평화는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시려는 평화는 근본 문제를 덮어둔 채 적당히 타협하고 적당히 무마시키므로 이루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우리 속에 자리 잡은 죄의 뿌리를 송두리째 뽑아 냄으로써, 하나님 앞에 바로 서게 하는 근본적인 치료를 통한 평화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모든 인류의 죄의 근원인 사탄(satan)과 맞서 투쟁하셨고 스스로 십자가를 지심으로써, 마침내 사탄의 세력을 꺾고, 죄와 죽음으로부터 모든 인류를 자유케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가로막고 있던 죄와 죽음을 제거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믿음으로 의롭다는 인정을 받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하나님과 더불어 화평을 누리고 있습니다.“ 라고 롬 5:1에서 바울사도는 고백합니다,

이제 우리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를 통하여 모든 인간을 새로 지으심으로 평등하게 만드신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은 믿음으로 구원을 받기 때문에 그 안에서 모두가 평등한 관계를 맺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는 종이나 주인, 남자나 여자, 유대인과 이방인의 차별이 모두 없어지고 믿음으로 구원받은 완전히 평등한 새로운 인간관계가 맺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를 가로막았던 율법을 십자가로 폐하시고 이 두 민족을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되게 하시어 평화를 누리게 하셨다고 엡2장 11-17절에서 말씀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모든 인간을 완전하게 평등하게 하시므로 평화를 누리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 모두가 새로 지음 받지 아니하고는 평등하게 될 수 없고, 평등함 없이는 진정한 평화란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이와 같이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를 통하여 하나님과 우리가 화목하게 하시고, 동시에 모든 사람을 새로 지으심으로 하나되게 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전하시는 평화의 복음이요 십자가의 복음입니다. 이런 평화의 복음을 우리가 믿도록 성령께서 역사하시고 그 결과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참된 평화를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5.평화는 교회를 통하여 성취됩니다.
이 평화의 복음을 받은 교회는 이 복음을 세상에 분명하게 알려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이 땅에서 전쟁을 종식시키고 평화로운 세계를 만들려고 여러 가지로 노력하였습니다. 유엔이 창설된 것도 바로 이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모든 노력에도 불구하고 평화는 오지 않고 있습니다. 평화의 복음을 통하지 아니하고는 결코 이 땅에 평화가 올 수 없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제 교회는 분명한 목소리로 평화의 복음을 이 세계 속에 전하여야 합니다. 이 세계의 평화는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갖지 아니하고는 올 수 없다는 사실을 확신 있게 선포하여야 합니다. 우리 민족의 평화와 통일도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가 형성되지 아니하고는 이루어질 수 없다는 확신을 교회가 분명하게 밝혀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단순히 복음을 전하는 것으로만은 충분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정의가 이 땅에 실현(實現)되지 아니하고는 그분과의 관계를 올바로 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교회는 불의와 악이 있는 곳에서 언제나 정의를 실현하기 위하여 외치고, 실행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평등을 깨트리는 온갖 편견과 그릇된 사회 제도에 도전하여 이를 시정하지 않으면 진정한 평화는 실현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온갖 이념에 포로가 된 사람들로 하여금 그 이념에서 자유함을 얻게 하기 위하여 이념을 초월한 하나님의 나라를 분명한 목소리로 전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이유입니다.

평화를 위하여 일하는 자가 복이 있다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면서 우리는 이 땅에 평화를 실현하기 위하여 불의와 악과 투쟁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동시에 교회는 평화와 전쟁에 관한 문제에 관심을 갖고 전쟁을 예방하며 전쟁을 일으키는 요인들을 제거하기 위하여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반전, 반핵 운동이 바로 이에 해당합니다. 역사상에 많은 전쟁이 일어났지만, 또한 전쟁을 예방하려는 선의의 의지들이 결집되어 미연에 방지된 전쟁도 있다는 사실을 우리가 기억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난날에 군사 독재가 정권 유지를 위해 남북의 대립 양상을 더욱 첨예화시키고 적개심을 더욱 조장하였던 일을 기억합니다. 교회는 바로 이런 독재자들의 어리석은 전쟁 의지를 꺾고 평화를 실현하기 위해 싸워왔던 것입니다. 지금 교회들은 평화와 통일에 관한 깊은 관심을 가지고 기도하며 노력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노력은 좀 더 구체화되어 반전 운동에까지 전개되어야 하며, 마침내 이 땅에서 군대가 감소되고 모든 무기 공장들이 다른 산업시설로 전환되도록 계속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제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

<엡2:11-17> P-396의 말씀을 읽으시겠습니다.
(11)그러므로 기억해 보십시오. 여러분은 육신적으로는 이방 사람들이었고 육체에 행한 할례를 받은 사람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에게 할례를 받지 않은 사람으로 불리는 사람들이었습니다.
(12)그 당시 여러분은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백성으로부터 제외된 사람들이며 약속의 언약들에 대해 생소한 사람들이며 세상에서 소망도 없고 하나님도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13)그러나 그때는 하나님에게서 멀리 떨어져 있던 여러분이 이제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습니다.
(14)그리스도는 우리의 화평이시니 자기의 육체로 둘을 하나로 만드신 분이십니다. 그분은 중간에 막힌 담, 곧 원수된 것을 헐어 내셨고
(15)조문으로 된 계명의 율법을 폐하셨습니다. 이는 그리스도가 그분 안에서 이 둘로 한 새 사람을 창조해 화평을 이루게 하시고
(16)십자가를 통해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셔서 자기 안에서 원수된 것을 없애 버리시기 위한 것입니다.
(17)그리스도는 오셔서 먼 데 있는 여러분에게 화평을 전하셨을 뿐 아니라 가까운 데 있는 사람들에게도 화평을 전하셨습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평화(平和=peace)이십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유대 사람과 이방 사람이 양쪽으로 갈려 있는 것을 하나로 만드신 분이십니다. 그분은 유대 사람과 이방 사람 사이에 가르는 담을 자기 몸으로 허무시고, 여러 가지 조문(條文)으로 된 계명의 율법을 폐(廢)하셨습니다. 인간이 하나님과 원수되었던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하나님과 하나되게 하신 것입니다.

평화는 내적인 평화로만 머물러서는 아니 됩니다. 우리가 만약 내 마음의 평화만을 원한다면 깊은 산속 수도원에 들어가 혼자 있으면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나만의 평화일 뿐입니다. 진정한 평화는 바로 이 세계 속에 실현되는 것을 말합니다. 평화는 바로 이웃과의 관계에서, 이 사회 속에서, 그리고 민족과 세계 속에서 이루어지는 평화를 뜻하는 것입니다.

성령님께서 우리 속에 역사하실 때 우리는 하나님과 화해하여 바른 관계를 가지면서 동시에 이 땅에 있는 모든 갈등과 싸움을 끝내고 서로가 평화롭게 사는 그 날을 위해 헌신하게 되는 것입니다. 작게는 내 가정에서부터 시작하여 교회의 평화, 이 사회의 평화, 더 나아가 이 민족의 평화를 이루기 위하여 노력하여야 할 것입니다. 이것은 결국 하나님의 통치를 이 땅에 실현시키는 하나님 나라 운동입니다. 성령님은 우리로 평화의 열매를 맺도록 우리를 이끄시며 우리에게 능력으로 함께 하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말씀을 따라 산다고 할 때 그것은 바로 성령의 이끄심을 그대로 따르는 것이요, 그 결과로 우리는 평화의 역군이 되는 것입니다.

이제 가정의 평화, 교회의 평화, 이 민족의 평화, 더 나아가 세계의 평화를 위해 그리스도 안에서 변화된 삶을 이루어 가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Amen !

8.찬송: 263장 ”이 세상 험하고“

9.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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